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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길고 길었던 여름이 간다 / 하성란

등록 2011-09-16 19:13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그 애의 고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서울의 나는 학교를 뛰어다니는
그 애의 모습만 그리고 있었다
엄마는 내 마음을 몰라줬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걷고 있는 날 보고도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묻기보단 호주머니에 왜 손은 넣고 다니느냐고, 볼품없어 보인다고 지청구부터 하던 엄마였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일어나는 변화들도 엄마에게 듣기보단 앞서 경험한 동네 언니나 친구에게 들어 알았다. 그런 엄마가 야속하기보다는 좀 어색했다.

그래서였을까, 딸을 낳았을 때는 엄마도 이렇게 힘들게 나를 낳았구나, 라는 생각은 잠시, 딸에게 친구 같은 엄마가 되어주자는 결심부터 했다. 당황하지 않도록 이렇게저렇게 귀띔해주고, 혹시나 준비물을 빠뜨리고 등교하면 혼이 나봐야 그런 실수 다시 않는다는 엄마의 주장과는 달리 전력질주해 딸아이를 따라잡곤 했다. 돌아오는 길에야 트레이닝복에 앞치마 차림이라는 걸 깨닫고 창피스러워졌다. 반은 흘려들을 거면서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 애가 식탁 의자에 앉아 짧은 두 다리를 대롱거리면서 조잘조잘 수다를 떨 때면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두고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며 고개를 젓던 여자 선배의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올 여름방학 내내 그 애는 하는 일 없이 뒹굴댔다. 여느 고등학교 2학년생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나치다 방 안을 들여다볼 때면 누워 있는 그 애의 모습이 보였다. 밀린 공부나 독서는커녕 친구도 만나지 않는 눈치였다.

고작 일년 반이었다. 자정 넘어 어둑신한 아파트 광장을 들어서는 대형 학원버스가 괴기스럽게 보이기 시작한 뒤로 아이와 결정해 내린 일이었다. 책가방을 들고 의무적으로 학교와 학원을 왕복하는 것에서 벗어나 입시와는 무관한 과목도 배우고 친구도 사귀고 자연 속에서 지내면서 안에 고갱이가 잡히기를 바랐다. 그 애가 엄마 손이 닿지 않는 지방 학교로 간 지 일년 반이었다.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퇴근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허리가 부러졌냐!”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낯설었다. 그 애는 마지못한 듯 일어나 앉았다. 내 얼굴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차 친정에 묵을 때였다. 초인종이 울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혹시나 잠들었을 딸을 배려한 듯 엄마와 방문자는 소곤거렸다. 하지만 집안은 적요해서 띄엄띄엄 이야기가 건너왔다. 출산한 딸과 신생아의 건강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도란도란, 어느 말끝엔가 엄마가 수줍은 듯 말했다. “내 딸은 나랑 달라. 목소리도 나처럼 크지 않아. 나랑 정말 달라.” 그제야 알았다. 내가 엄마를 어색해했던 것만큼 엄마도 딸이 어색했다는 것을. 콩나물 한 줌 더 달라며 실랑이를 벌이는 엄마가 창피해 멀찍이 떨어져 있던 딸. 물어봐야 모를 게 빤하다는 듯 “엄만 말해도 몰라”라고 쏘아붙이던 딸. 한번도 엄마에게 힘들지 않으냐고 묻지 않았다. 딸도 엄마 마음을 몰랐다.

아이를 한 학기 동안 맡아주었던 홈스테이 선생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밥도 잘 먹지 않고 수업도 빠질 만큼 끙끙 앓았던 날도 있었다고 했다. 선생님도 애가 많이 탔던 모양이었다. 그 애에게 어떤 고민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서울의 나는 신이 나 학교를 뛰어다니는 그 애의 모습만 그리고 있었다.

아이를 학교에 내려놓고 차를 돌렸다. 해가 떨어지자 삽시간에 산그림자가 마을을 뒤덮는다. 무슨 일 있어, 라고 묻지 못한 채 방학 내내 아이를 재우치기만 했다. 힘이 들면 좀 쉬어도 된다고,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지리산 계곡과 숲을 지나왔을 바람이 분다. 어제 바람과는 확연히 다르다. 어느새 길고 긴 여름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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