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 칼럼니스트
젊은이 중심의 요즘 세상에서
지혜와 유머로 가득한 그들의
노년 기록을 읽는 것은 반갑다
지혜와 유머로 가득한 그들의
노년 기록을 읽는 것은 반갑다
십년쯤 전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 속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과격해 보였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월급에 기대어 사는 게 내가 아는 세계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받는 족족 월급은 귀신처럼 빠져나갔다. 아이 둘과 사는데 왜 이리 돈이 많이 드는 걸까. 마트를 한 바퀴 돌고 나올 때마다 나는 쇼핑백의 무게와 쓴 돈의 액수 때문에 쓸쓸해졌다.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걸 알고 비참해지던 무렵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 딱 바로 그때 그녀를 만난 것이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적어도 절반 넘게 자급자족한다. 스스로 땀 흘려 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 양식을 장만한다. 은행에서 절대 돈을 빌리지 않는다. 돈을 모으지 않는다. 따라서 한 해를 살기에 충분한 만큼 노동을 하고 양식을 모았다면 돈 버는 일을 하지 않는다. 되도록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일을 해낸다. 집짐승을 기르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 않는다.’ 헬렌과 남편 스콧이 세운 원칙은 이제 낯설지 않다. 오히려 싱싱해 보인다.
내가, 아니 우리들이 떠나지 못하고 있는 도시를 그녀는 일찍 떠났다. 1904년 미국에서 태어났고 바이올린을 공부하다가 학자였던 스콧 니어링을 만난 헬렌. 그들이 뉴욕을 떠나 시골살이를 시작했을 때 헬렌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남을 이기고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쉴 새 없이 세뇌하는 문명으로부터 떠난 것이다. 버몬트 숲속에서 단풍나무 수액을 뽑아 시럽을 만들고 사탕과자를 만들어 팔았다. 자기 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와 과일로 밥상을 차렸다. 음식은 되도록 복잡하지 않게 조리했다. 헬렌의 레시피는 요즘 뜨고 있는 구석기인들의 밥상에 가깝다. 굽거나 볶는 과정을 최소화하고 원재료의 향기와 형체를 최대한 살리는 방식이다.
자급자족의 기반 위에 부부는 삶의 자치를 누렸다. 땅에 뿌리박은 이들답게 그들은 땀 흘리는 일상 속에서 우려낸 진한 육수 같은 깨달음을 우리에게 나눠준다. 내 남편, 내 아내라는 표현이 지나친 구속과 소유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거의 쓰지 않았다는 그들. 짐승을 우리에 가두지 않았고 애완용으로 키우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외따로 떨어져 있었던 건 아니다. 이웃과 어울려 일하고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살뜰히 대접하며 소소한 것들을 기쁘게 나누었다. 스콧이 죽은 뒤, 마을 사람들은 “스콧 니어링이 백년 동안 살아서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었다”라는 깃발을 들고 왔다.
그들은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이었다. 우주 전체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과 함께하는 일상의 농사일이 곧 그들의 명상이었으니 말이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무차별한 외경은 그들의 노년을 더욱 성숙한 의식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젊은이 중심의 세상에서 무시되거나 저평가되기 일쑤인 이 시대에 지혜와 유머로 가득한 그들의 노년 기록을 읽는 것은 새록새록 반갑다. 헬렌 부부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죽음이다. 죽음은 막다른 골목길이 아니라 열려 있는 여행길이라는 게 헬렌의 생각이었다. 죽음에 임박해 산소호흡기나 심장충격 같은 의료 처치를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던 스콧의 유언장에도 갈수록 공감한다. 헬렌 부부는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나 깨어남이다”라고 말한다.
90살까지 산다면 헬렌처럼 나도 90살의 관점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그 멋진 신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샘솟는 영감을 주는 헬렌 왕언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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