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미 동화작가
바람을 빌려 스스로 흔들고 있어
죽은 것들을 버리기 위해서
더 잘 서 있으려고
죽은 것들을 버리기 위해서
더 잘 서 있으려고
청설모가 메타세쿼이아를 잽싸게 타고 오르며 ‘고고고고’ 소리쳤다. 나를 알아채고 경계하는 날카로운 고음이 숲에 울려 퍼지는 걸 들으며 나는 걸음을 멈춘 채 청설모를 눈으로 쫓았다. 놀랍게도 꽤 높은 가지의 청설모가 나를 정확히 내려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오가는 사람 드문 이 숲에서 나를 알아봐준 녀석, 참으로 고맙다. 일에 지치고 외로워서 혼자 올라온 사람을 빙긋 웃게 만드니.
요즘 문득문득 서러워지곤 했다. 잦은 강연에다 이런저런 인터뷰, 어떤 행사의 부분을 담당하느라 쫓기듯 지내는 것도 버겁고, 아무리 경제적인 반경을 고려해서 일정을 잡아도 녹초가 된 몸이 회복 안 되니 힘겹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혼란스러워서.
지난 일요일에 지방에서 일정 하나를 마치고 다음 장소로 가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 적이 있다. 별안간 뒤통수가 뻐근해지면서 눈이 쏟아질 듯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누적된 피로 탓이지만 다음 일정이 남았으니 벌써 지치면 안 되는 거였다. 사흘 전부터 이어진 아홉 번째 일정. 내일은 여섯 시간 강의까지 있다. 기분전환이라도 하려고 교회에 안 다니는 지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묵묵부답. 다른 사람에게 보내도 마찬가지. 갑자기 세상이 텅 빈 듯 외로워지며 눈물이 솟았다. 그래, 오늘은 일요일이지. 한집에 사는 남편도 내가 하는 일은 신선놀음인 줄 아는걸. 긴장한 채 두세 시간 떠들고 나면 구토 증세로 속이 메스껍고 어지럽다고 아무리 말해도 엄살쯤으로 여기는걸. 울면 안 된다. 나이 오십이 돼 가는, 잘나간다고 소문난 작가 체면이 있지. 콤팩트에 비친 충혈된 눈을 들여다보며 분첩으로 슬픔을 꾹꾹 눌러 감추고, 행사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책에 묵묵히 사인을 하고,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며 강연을 마쳤다.
나 많이 힘들어. 쉬고 싶어. 이즈음에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가 고개를 끄덕여줄까. 넌 그래도 작가잖아. 책도 영화도 기록 세웠다며. 배부른 소리 하지 마. 그럴 줄 짐작하기에 나는 잠자코 견디기로 했던 것 같다. 사실 더 어려운 사람이 많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니까. 평생 글 쓰며 책 읽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고, 어떤 강연이나 인터뷰는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왜 이렇게 홀로 버려진 듯 서러울 때가 많고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허전한지 모를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의 한 무리 사람들 틈에 끼어서 찬바람 맞고 서 있는 것처럼.
한발 한발 언덕을 오르며, 나는 이렇게 혼자서 간다, 내 발바닥이 디딘 여기가 내 현실이다, 마음 다독이며 올라온 사람을 요란하게 맞아준 청설모. 그 재빠른 녀석을 바라보는데 늘씬하게 뻗은 메타세쿼이아들의 푸르른 머리채가 눈에 들어왔다. 서로 어우러져 부드러운 곡선으로 하늘을 모자이크하고 있는 풍경. 숲만큼 질서를 잘 유지하는 사회가 또 있을까.
갑자기 메타세쿼이아들이 부르르 몸을 떨어댔다. 마치 스스로 용틀임하는 것처럼 보인 게 착각인지 몰라도 나는 죽은 이파리와 잔가지가 떨어져 내리는 걸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청진기를 나무에 대고 귀를 기울이면 물관이 꿀꺽 물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던 어떤 이의 말이 떠올랐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나무도 몸을 흔드는구나. 바람을 빌려 스스로 몸을 흔들고 있어. 죽은 것들을 버리기 위해서. 더 잘 서 있으려고.
내가 왜 혼자서라도 산에 오르고 싶어지는지 오늘에야 깨닫는다. 내 한 걸음의 소중함을 알려준 산이 이제는 혼자서라도 스스로를 추스를 줄 알아야 한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외로움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그걸 알게 돼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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