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자유는 좋은 것이다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자유’는
민주주의도 자유도 억압했다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자유’는
민주주의도 자유도 억압했다
새벽부터 연구실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를 하다가 저녁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는 교수가 있다. 가족들이 좋아할 리 없다. 그 교수가 이런 농담을 했다. ‘아버지를 닮지 말자, 이게 우리 집 가훈이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젊은 교수가 흥을 돋우었다. ‘아버지를’보다 ‘아버지는’이라고 해야 더 강력한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나이 든 국문과 교수가 국문과 교수답게 훈수를 했다. ‘아버지는’이 더 강할지 모르겠으나 ‘아버지를’이 정식 표현이라고 지적하고 나서 ‘그래도 가훈인데’라는 말을 덧붙여 농담을 마무리했다.
그 국문과 교수가 정식 표현이라고 부른 것을 나는 절대적 표현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는’이라고 말할 때는 ‘어머니는’이나 ‘할아버지는’ 같은 다른 비교의 대상을 암암리에 상정한다. 그 표현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아버지를’은 어떤 비교의 대상도 없이 곧바로 그리고 오로지 아버지를 문제의 중심에 놓는다. 그 표현은 절대적이다.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도 이 절대적 표현에 의지한다. 그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여 자기 마음을 온전하게 전한다.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이 사랑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사랑이다. 이 사랑은 어쩌면 그에게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삶의 여러 난관이 그의 사랑을 둔하게 만들고, 그의 미숙한 정신이 작은 일도 고깝게 생각한 나머지 사랑 속에 미움이 싹틀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의 그는 완벽한 사랑을 꿈꿀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 떨리던 순간의 추억을 되새겨 삶의 고비마다 무뎌지거나 빗나가는 사랑을 다시 날카롭게 바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라는 말에 대해서도 필경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우리 삶의 환경이고,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저와 이웃의 행복을 가꾸어가는 터전이다. 물론 우리가 완전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 정의가 올바르게 실현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이 정말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자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살아온 역사도 우리의 민주적 의지를 제약하고, 여러 가지 물질적 조건도 우리를 가로막는다. 우리 개개인의 민주적 자질이 충분히 성숙한 것도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인격이 완성된 것도 아니다. 이 점은 우리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다. 어디에서건 민주주의의 이상이 실현된 적은 없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저마다 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옳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조건이 이러저러하니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까지만 실현하자는 식으로 민주주의에 선을 긋는 것은 현실의 압제를 인정하자는 것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에는 우리가 어떤 난관에 부딪히고 어떤 나쁜 조건에 처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가깝게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는 뜻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그 뜻이 거기 들어 있는 다른 모든 뜻보다 앞선다. 민주주의에 다른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가 그와 같다.
지금 어떤 사람들이 학생들의 교과서에서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써서 민주주의에 선을 그으려 한다. 자유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 땅에서 자유를 억압한 적은 없지만,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은 민주주의도 자유도 억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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