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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낮은목소리] 그들은 더 낮은 곳에서 더 춥게 산다 / 정호성

등록 2011-11-24 19:38수정 2011-11-25 11:47

정호성  서울광역자활센터장
정호성 서울광역자활센터장
정호성 서울광역자활센터장
서울 저소득층 에너지 소비량은
서울시민 평균보다 38%나 적다
잠결에서 세 살 난 아들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일어나려고 했으나 머리가 핑핑 돌고 도저히 몸을 걷잡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연탄가스를 마셨다는 것을 알았다. 연탄가스야 전에도 가끔은 마셨지만 이번에는 단단히 마신 것 같았다. ‘아, 여기서 일어나지 못하면 죽지’ 하는 생각에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옆에서 자고 있던 아내를 깨웠다. 아내도 역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겨우겨우 일어났다.

기다시피 부엌으로 나와 창문을 열고, 바깥문을 열었다. 밖은 아직 새벽이라 어슴푸레했다. 겨울의 찬 공기가 살을 에었으나 문을 계속 열어둘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움은 더욱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연탄가스 맡았을 때 효과가 있다는 김칫국물도 마시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똥 냄새도 맡아 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다. 그날은 온종일 정말 고문당하는 것과 같은 시간을 보냈고 저녁이 돼서야 겨우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원인을 알아보니 물론 날씨 탓도 있었지만 피브이시 굴뚝 위에 달아놓은 환기팬의 프로펠러가 빠져 굴뚝을 막아버렸고 모터만 맥없이 돌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들의 울음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날로 황천길로 갔을 그런 기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다.

아마 이런 일은 나만의 경험은 아니었을 것이고, 기성세대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겪었을 것이다. 자취하던 아는 후배도 연탄가스로 목숨을 잃었다. 겨울만 되면, 산동네에선 ‘누가 연탄가스로 죽었다더라’ 하는 얘기들이 회자되기도 했다. 우리의 생사를 넘나들게 만들었던 연탄이지만 추위에 얼어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땔 수밖에 없는 것이 연탄이었다.

그 당시 이런 유머도 있었다. 죽으면 염라대왕 앞에 가 총 맞아 죽은 사람,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병으로 죽은 사람 등 줄을 서게 되는데 어떤 사람이 이 줄에도 서지 못하고 저 줄에도 서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더란다. 염라대왕이 ‘왜 너는 왔다 갔다 하느냐?’ 물으니까, ‘저는 연탄가스 마셔서 죽었는데요, 어느 줄에 서야 될지 몰라서요’ 하더란다.

몇 년 전 사랑의 집수리 사업으로 서울 도심의 한 산동네 가구를 수리하게 되었는데, 구들장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기름보일러나 석유보일러는 연료비가 비싸, 굳이 연탄을 때야 된다고 해서 구들장을 연탄보일러로 교체해 드렸다. 그때 말없이 기뻐하시던 홀몸노인의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소득에서 난방비가 10% 이상을 차지하는 가구를 ‘에너지빈곤층’이라 하며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약 8%인 130만가구가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기름값·가스값이 겁나 연탄을 때고 사는 빈곤가구들에는 ‘에너지빈곤층’이라는 것도 사치스러운 용어일 수 있다.

아직도 연탄을 때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 사회가 유지될 수 있도록 온갖 뒤치다꺼리를 다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2009년 서울시 저소득가구를 대상으로 에너지소비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서울시 저소득가구의 1인당 에너지소비량은 전국 평균에 비해 28%, 서울시민 평균에 비해 38% 적은 수준이었다. 그만큼 춥게 산다는 증거이다.


정부에서는 연탄쿠폰(2009년 대상자는 8만1843명), 요금 할인, 시설개선 지원사업 등을 통해 저소득층 에너지 지원을 하고 있고, 2006년 한국에너지재단 설립, 2007년 에너지복지헌장 채택 등 여러가지 에너지 복지정책이 시행되고 있지만 실효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다. 2010년 에너지복지법 제정이 불발에 그치는 등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바쁜 일정을 잠시 멈추고, 연탄을 때며 겨울을 나는 사람들을 돌아보자. 한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지낼 정도로 과잉 난방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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