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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1997년 겨울, 그 후 / 박순빈

등록 2011-12-01 17:21수정 2011-12-01 18:40

박순빈 논설위원
박순빈 논설위원
IMF가 어찌할 도리 없이 다가온
외부 충격이었다면 FTA는 맹목적
숭미 시장주의자들의 직수입품이다
그해 겨울 추위는 매서웠다. 사람들 마음은 날씨보다 더 춥고 시렸다. 연말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 예년의 절반으로 줄었다. 고아원에선 난방을 틀지 못해 밤새 아이들이 추위에 떨어야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는 그렇게 기습적으로 다가왔다. 1997년 12월3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와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대기성 차관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형식은 우리 정부의 요청에 따라 체결된 각서였다. 내용은 채권자인 외국 금융자본의 주문으로 채워졌다.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 적대적 기업인수합병(M&A) 법제화, 노동시장 유연화 대책 마련 등.

다음날 조간신문들은 짐짓 비통한 논조로 소식을 전했다. ‘경제주권 상실’, ‘경제 신탁통치 시작’, ‘제2의 국치일’ 같은 제목이 1면을 장식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았다. 그 뒤 실제로 아이엠에프는 경제·사회정책 전반에 개입해 세상을 확 바꿔놓았다. 사람들은 달라진 세상을 ‘아이엠에프 체제’라고 말한다. 어떻게 바뀌었는지 말해보라면 각자 다르다. 이 체제에서 삶이 피폐해진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극소수 혜택을 본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엠에프 체제 이후의 특징에 대한 공통된 의견은 있다. 바로 국가권력이 시장으로 대폭 넘어갔다는 것이다.

2011년 겨울, 한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반 논란으로 뜨겁다. 협정은 아이엠에프가 몰고온 충격보다 훨씬 큰 변화를 예고한다. 협정은 아이엠에프식 구조조정과 마찬가지로 외부 충격을 통한 국가 개조 프로그램이다. 협정이 적용되는 범위나 기간, 개방과 자유화의 폭과 깊이를 보면 아이엠에프와 맺은 각서는 협정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협정에 따라 시장으로 넘어가는 권력은 미국 통상당국자들까지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말할 정도다.

한-미 에프티에이를 반대하는 쪽에선 협정문에 숨어 있는 ‘악마들’을 찾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각론을 파고든다. 그러나 좀 비효율적이고 공허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지금 단계에선 어느 쪽이든 주장의 객관성과 타당성을 입증하기 어렵다. 협정의 특정 조항을 해석해서 미래 가상상황을 그리고, 이를 전제로 펼치는 주장은 괴담으로 공격받기 쉽다.

협정의 경제적 기대효과를 둘러싼 공방 역시 겉도는 느낌이다. ‘10여년 동안 국내총생산(GDP) 5.67% 증가, 일자리 35만개 증가’라는 정부의 기대효과 추정치는 협정을 찬성하는 쪽에서도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일찍이 케인스는 “사람들의 판단과 결정은 수학적 기대치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신념에 의존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므로 협정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저들의 신념을 파헤치는 게 더 생산적일 듯하다.

그 신념은 그리 복잡하지도 않다. 공공의 영역은 되도록 시장에 맡겨야 하고, 시장은 최대한 개방해 치열한 경쟁이 이뤄져야 하며, 미국의 법과 제도는 국제표준으로서 유일한 선진화의 길이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국가의 자리를 기업과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시장으로 채우자는 게 협정 찬성론의 본질 아닌가?

14년 전 겨울에 몰아닥친 아이엠에프 체제는 우리 국민이 거부하기 힘든 상황에서 맞은 큰 충격이었다. 한-미 에프티에이는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이 기를 쓰고 수입해 오려는 또다른 충격이다. 일단 상륙해버리면 현실적으로 되돌리기가 녹록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새로운 충격은 이전의 비슷한 충격에 대한 경험을 되살리면 돌파할 길이 보인다고 한다. 충격을 강요하는 저들의 신념과 수법을 미리 알고 대비하면 고통스럽더라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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