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 칼럼니스트
어느새 내겐 말과 생각이 넘쳐나던
날들이 지나가 버린 모양이다
마른 나뭇잎처럼 가벼워진 내가 좋다
날들이 지나가 버린 모양이다
마른 나뭇잎처럼 가벼워진 내가 좋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동네 대모산 길을 걷는다. 평일 오전 10시께, 드문드문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있을 뿐, 숲은 텅 비어 고요하다. 지난가을 붉은 잎으로 오가는 이들을 황홀하게 하던 단풍나무가 저만큼 보인다. 그래, 단풍이 진 뒤 그만 너를 잊었구나. 미안해, 미안해. 다가가서 단풍나무가 내민 손 같은 가지를 잡아 악수하듯 흔들며 인사를 한다. 실없는 행동이 우스워 하하 웃고 만다. 그늘진 오솔길을 벗어나니 햇빛이 눈부시다. 마른 나뭇잎들이 매달린 나무들 사이를 걸으니 “햇빛은 나뭇잎 새로 반짝이고, 우리들의 노래는 즐겁~다”라는 옛 노래가 절로 터져 나온다.
내 은빛 머리칼까지 빛나게 하는 해님께 윙크를 날린 뒤 양지쪽 작은 벤치에 앉는다. 추위 때문에 시원찮은 어깨 위에 겨울 햇빛 마사지나 해볼까. 오가는 사람도 없으니 좀 졸아도 괜찮을 터. 근데 겨울 햇빛처럼 고맙고 따뜻한 게 세상에 도대체 몇 가지나 될까? 아마도 햇빛이 공짜이기 때문에, 바빠 죽겠는 그들은 고마운 줄을 잊는 것이려니. 한가한 나는 실눈을 뜨고 하늘을 우러러 “해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을 한다. 해님을 독대하는 영광을 누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무에 달린 나뭇잎들을 쳐다보니 나 자신도 마치 마른 나뭇잎 같다. 우와, 자유란 이런 맛일까?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나, 마른 낙엽 같아진 내가 좋다. 이 순간 산과 하늘과 숲이 있는 풍경 속 나는 그 일부가 된 듯하다. 아니 그 풍경 속에 그냥 녹아 있는 느낌, 그만 숨을 죽인다.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는 길, 마트에 들러 두부와 시금치, 부추, 그리고 대파 한 단을 산다. 최근 나는 대파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대파를 썰다 느낀 건데 뿌리 쪽 흰빛에서 이파리 부분의 녹색에 이르기까지 바림(그러데이션)이 기막히게 어여쁘다. 백합이나 칼라보다 못할 게 뭐냐? 게다가 우리네 밥상을 휘젓는 그 향기의 존재감이라니! 대파의 아름다움을 그동안 과소평가했음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대파 한 단을 미스코리아가 꽃다발을 안듯 가슴에 품고 집으로 온다. 부추를 다듬으려니 지난여름 삼청동 가파른 계단길 어느 집 작은 마당에 하얗게 피어 있던 부추꽃이 생각난다. 어쩌면 그리도 가냘프고 섬세하게 피어날 수 있었을까? 부추꽃에 반한 뒤, 나는 세상의 모든 채소들이 제각각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워내고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보랏빛과 흰빛 서늘한 미모를 지닌 도라지꽃 외에도 가지꽃, 당근꽃, 오이꽃, 모두들 각각의 향기와 빛깔로 꽃을 피워낸다. 세상은 채소꽃들을 하찮게 여긴다. 그러나 결국 세상은 이 온갖 꽃들이 함께 피어나는 축제의 한마당일 터. 미모의 서열 같은 건 당치 않다.
전에 없이 한가해진 요즘, 바빴던 시절엔 전혀 몰랐던 것들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 나이로 흐릿해진 육안 대신에 마음의 눈을 뜨고 있는 건가? 언제나 그렇듯이 이로운 쪽으로 해석한다. 그래, 지금까지와 다르게 보라는 것, 바로 이거다. 삶이란 결국 체험 아닌가. 우리 모두는 무슨 최종적인 성과를 얻고 무슨 엄청난 결과를 내기 위해 사는 건 아니다. 인생에 단 하나 목적이 있다면 그건 인생을 과정으로서 온전하게 체험하는 것이겠지. 그 과정에서 배우고 얻어야 할 것이 있는 것 아닌가.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느새 내겐 말과 생각이 넘쳐나던 날들이 지나가 버린 모양이다. ‘남들이 좋다는 것, 남들이 다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살았던 날들’이 끝난 것이다. 동시에, 그리도 굳건하던 자아정체감마저 흐물흐물 녹아버린 걸까? 마른 나뭇잎처럼 가벼워진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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