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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타이어 향기/황선미

등록 2012-01-27 19:07

황선미  동화작가
황선미 동화작가
쉬엄쉬엄 돌아보며 하라고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손길
그래서 바퀴는 찢어졌나봐
눈길에 춥기까지 한 성묘 길. 집을 나설 때부터 돌아올 일이 걱정스러운 게 도로 사정 때문이라 만나야 할 사람, 들러야 할 곳에서 여유랄 게 없었다. 요식행위처럼 안부를 묻고 덕담 나누고 입원한 동생마저 비쭉 들여다보고 돌아서는 게 면구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쁘니. 농작물이 걷히고 눈 덮여 있는 밭으로 들어가 산소 가까이 차를 대기도 했다. 전에는 바짓가랑이에 흙 묻히고 거미줄에 걸리기도 하며 걸었던 길이 너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게 어리둥절하면서도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다. 일 많은 사람 시간 절약하라고 조상님이 이렇게 도와주시네, 농담도 했다.

아직 밀리지 않는 시골 국도를 달릴 때만 해도 순조로운 귀경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느껴졌고 차가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바퀴가 찢어진 것이다. 어이없게도 바퀴에 박혀버린 게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아. 눈 덮인 밭에 삐죽삐죽 나와 있던 게 들깨 베어낸 밑동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설마 그게 바퀴에 박혔으리라고는. 야금야금 바람이 빠지다 주저앉으며 쓸려버린 바퀴 때문에 낯선 들판에서 발이 묶여버리고 말았다. 때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갈아야 할 판. 약게 움직이던 일정이 허무해지고 마감 임박한 원고를 생각하니 정초부터 이게 웬 날벼락인가 불안해졌다.

명절이라 거의 모든 가게가 문 닫은 시골에서 타이어 가게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늙수그레한 남자가 ‘추운데 들어가 계세요’ 하며 주저앉은 바퀴를 살펴주었다. 시커먼 타이어가 천장까지 쌓여 있는 비좁은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훅 끼쳐오는 타이어 냄새와 난로의 온기. 분명히 낯선 공간이건만 낯설지가 않았다. 각인된 향기를 되살리는 타이어 냄새. 뺨을 감싸주는 손길에 얼었던 몸이 풀어지는 것처럼 참 이상한 기분. 따뜻한 물을 만나자마자 화사하게 만개하는 모리화처럼 오래 잊고 있었던 감정이 오소소 깨어나는 느낌이랄까.

무쇠 난로와 집게가 꽂혀 있는 연탄. 공구 때문에 휘어진 철제 선반. 녹이 슨 책상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오래된 책들. 내 기억의 맨 밑바닥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이미지다. 내 아버지의 자리. 구멍 난 타이어를 때워주고 푼돈을 벌었던, 언젠가 찾아올 누군가를 위해 바퀴살을 일일이 끼우고 조여 바퀴를 완성하던, 돋보기를 쓰고 기름 앞치마를 두른 채 난롯가에서 몇 시간이고 일하던 머리카락 성긴 내 아버지의 자리. 그 오래전 시간으로 되돌아간 나는 어린애처럼 서서 내 차의 바퀴를 갈아주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어쩌다 한번 찾아가면 손님보다 먼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 스물몇살에도 그랬는데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러고 사는구나. 그때는 그래도 무언의 시선으로 나를 반성케 하던 아버지가 계셨지. 새 타이어의 냄새가 신선하게 느껴지고 세상에 저보다 예쁜 동그라미는 없을 거라고 안심할 만큼 어렸지. 나는.

혼자서만 바쁜 체 앞만 보고 달리다 그만 다리가 절뚝 걸려버린 날. 아버지의 자전거 가게는 이미 없어져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나의 일과라는 건 걷기보다 자전거 속도보다 빨라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변했으니. 그런데 쉬엄쉬엄 하라고, 나를 받쳐주는 게 무엇인지 좀 보라고 토닥토닥 어깨 두드려주는 손길을 경험했다. 나의 오늘이 지나간 시간으로 피어난다는 걸 자꾸 잊으면 안 되는데.

황선미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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