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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삶을, 들어올리다 / 김별아

등록 2012-02-17 19:09

김별아 소설가
김별아 소설가
무거운 짐을 어떻게 들지
그들은 제대로 가르쳐줬다
얏, 눈앞의 삶도 으라차차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가 문득 궁금증을 자아낸다. 왜 삶의 고달픔은 넓이나 높이나 부피가 아닌 무게로 표현되는 걸까? 좁고 작기보다는 무거운 삶, 그것은 아마도 삶을 ‘짐’으로 여기는 데에 뒤따르는 표현일 테다.

“무겁죠?” “무겁죠.”

중학교 2학년 때 역도를 시작해 9년간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체육대학교 유준호 선수가 씩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에게 역도는 유일한 꿈이자 마지막 희망이란다.

“무겁죠?” “……무겁죠.”

선수 생활 15년과 국가대표 10년을 거쳐 남자대표팀을 훈련시키는 고광구 코치는 담담하게 말했다. 역도를 하지 않았다면 어릴 적부터 꿈꾸던 마도로스가 되었으리라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눈앞에는 너울이 이는 먼바다와 눈부신 청새치 떼가 휙 지나갔다.

“무겁죠?”

우연히 런던올림픽을 6개월여 앞둔 태릉선수촌의 역도대표팀을 취재할 기회를 얻으면서, 나는 선수들에게 이 멍청하고도 잔인한 질문을 꼭 하고 싶었다. 자기 체중의 너덧 배에 가까운 무게를 들어올리기 위해 하루에만 4만㎏ 이상의 바벨을 들고 내리는 그들에게, 손목과 허리와 무릎을 작신작신 내리누르는 중력에 홀연히 맞서는 신비를 묻고 싶었다. 그토록 무거운 숙명과 어떻게 맨몸뚱이 하나로 맞서는지.


“물론, 무겁죠. 하지만……”

1975년에 역도를 시작해 선수와 지도자로 30여년을 살아온 김기웅 여자대표팀 감독이 대답 끝에 말꼬리를 달았다.

“가벼울 때도 있어요. 충분한 훈련과 감정 조절로 몸과 맘의 상태가 좋을 때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기도 합니다.”

평생을 바벨과 씨름하며 신기록의 환희에서 부상과 슬럼프의 절망까지를 고루 맛본 그의 말은 자신이 지금껏 들어온 어마한 무게만큼이나 신중했다. 역도는 말 그대로 힘으로 도(道)를 닦는 일이다. 다른 종목과 달리 전신 근력을 쓰는 운동의 특성상 역도 선수는 이틀에서 사흘 이상은 쉴 수 없다. 언제나 근육이 긴장되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200㎏을 드는 선수도 단 50㎏의 바벨에 다칠 수 있기에, 역도는 성실과 인내로 오로지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해야만 하는 일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들여다본 사람은 깊고 넉넉하다. 역도 선수들이 대부분 내성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성격을 지닌 것 또한 끊임없는 훈련의 결과인 듯싶다.

3년쯤 지나면 선수의 몸은 자연스레 운동에 적합하도록 길들여진다. 하지만 그다음부터 자기 관리라는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매일 들어도 바벨은 무겁다. 하지만 들면 들수록 무게를 견딜 만큼 근육이 만들어지고 관절이 강화된다. 단에 오르면 봉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리하여 천근만근의 쇳덩이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질 때까지, 그들은 버틴다. 침묵과 집중 속에서 자신을 벼린다. 어쩌면 역도는 삶과 많이 닮은 운동경기일지도 모른다.

태산 같은 짐 앞에서는 누구나 아득해진다. 하지만 꿈이 무어냐고 묻는 내게 유준호 선수는 과연 무거운 짐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가르쳐주었다. 그는 ‘미래의 꿈’이란 건 없다고 했다. 바벨의 무게를 조금씩 늘려 목표를 하나하나 이루어 가는 데 익숙하기에, 꿈은 오직 그의 발치에 놓여 있다고. 그리고 그는 다시 씩 웃고는, 얏, 눈앞의 삶을 번쩍 들어올렸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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