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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황무지의 뜰 / 황선미

등록 2012-02-24 19:13

황선미 동화작가
황선미 동화작가
불쑥 마음 건드린 이웃 할머니
어쩌면 좋담, 엄마 미안해요
나한테 좀더 곁을 주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걸까. 누가 그랬다. 여름 태생은 추위를 더 못 견딘다고. 어려서도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요즘에는 몸이 추위를 잘 이겨내지 못하는 걸 절감한다. 유리창에 걸러진 2월의 볕이 아무리 화사해도 팔짱을 낀 채 내다보기만 할 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건 어깨를 못 펴게 추운 기억이 너무 많아서. 어쩌면 이 추위는 나의 내밀한 어딘가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전에 생겨버린 나도 어쩌지 못하는 깊은 구멍. 거기서부터 뿜어지는 한기.

사방이 황토다. 황토바람이 불어와 문틀에 쌓이고 빛을 잃은 소나무와 나목이 우두커니 서 있는 풍경을 바라보자니 가슴이 다 휑해진다. 과연 옳은 결정이었는지 또 의심이 들었다. 도시에 살아도 자연의 자식임을 잊을 수 없는 세대라 농사를 시작하기로 했으나 논을 갈아엎은 자리를 바라보는 일조차 심란하다. 저기에 복숭아나무를 심는다고 자라날까. 저 황토밭에서 고구마가 여물까. 굴착기가 뒤집어놓은 둔덕에 냉이가 다시 살아날까. 어쩌면 내가 상상한 농사라는 건 인테리어 잡지의 이미지 컷인지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돌이키기에는 늦었어. 계속 갈 수밖에. 면사무소에 농지원부 신청도 하고, 종묘상에도 들르고, 마을 어른들 초대하여 집들이도 하고.

도대체 뉘 집 고양이인지 모를 녀석이 벌써 며칠째 집 주변 여기저기에 영역 표시를 하고 있다. 안면이라도 틀까 싶어 내다볼라치면 새침하게 총총 떠났다가 어느 결에 또 나타나 오줌을 묻히고 다니는 고양이. 내가 커튼 뒤에서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아는 게 분명하다. 문고리에 손만 대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예민한 녀석과 나는 서로 염탐 중. 혹시 여기가 원래 녀석의 공간이었을까. 자기 영역을 반복해서 확인시키고 있는 녀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즈음에 작은 상자 하나를 받았다.

아랫집 할머니의 선물.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쌀을 고아서 만든 조청에 튀밥을 묻혀 손수 만들었다는 한과. 정성 가득한 선물을 받는 게 처음도 아닌데 기분이 정말 묘했다. 선하게 웃는 할머니 얼굴을 마주 바라보기도 어렵고 빈말로 감사치레를 하기도 어려웠다. 웬만하면 안 받고 관계의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드는 게 할머니 때문은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알 수 없는 부끄러움. 불순한 무엇을 들킬 듯한 겸연쩍은 마음에다 갑작스레 친정엄마처럼 다가든 존재의 부담도 있었다. 이런 배려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으므로.

며칠 전 꿈에서도 엄마가 어찌나 쌀쌀맞게 대하고 곁을 안 주던지 한참 울다가 깨었다. 나이 오십을 먹어도 달래지지 않는 어린애가 가슴 어딘가에 살아 있다니. 원망이 쌓여 살가운 말 한마디 못하고 보낸 엄마의 자리로 아랫집 할머니가 불쑥 들어오는 것 같은 불안. 엄마에게도 열지 못한 마음이 투둑 건드려지는 것 같아서. 집들이 시루떡을 맡길 방앗간과 시장을 알려주겠다며 앞장서시는 할머니 때문에 가슴이 묵직해졌다. 이런 상황에 전혀 연습이 안 된 사람에게 저토록 선하게 다가드니 어쩌면 좋담. 엄마한테 미안하다. 나에게 조금만 더 곁을 주지 그랬어.

황토바람이 부는 나의 뜰. 이 삭막한 풍경에서 도망칠 수가 없다. 내가 바로 황무지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아니까. 고양이가 또 오겠지. 벌판에 덩그러니 집을 세우고 선뜻 나서지 못하는 나보다 고양이가 낫다. 오늘은 내가 고양이만큼만 되어도 좋겠다.

황선미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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