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조부 유품조차 남은 게 없다
우리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
볼펜? ‘스뎅’통? 아냐, 나잖아
우리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
볼펜? ‘스뎅’통? 아냐, 나잖아
합정역에서 상수역에 이르는 곳곳이 재개발 공사에 들어갔다. 낯익은 건물들과 즐겨 다니던 골목이 사라지고 어느 날 공사를 알리는 거대한 가림막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가림막 틈새로 들여다보니 무너진 건물 잔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순식간에 한 마을의 흔적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이 기세로라면 우리 아파트 바로 아래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도 시간문제다.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늘 그렇듯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설 것이다.
얼마 전 지방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곁에 앉은 선배의 고향 이야기를 들었다. 몇 개의 성씨 집단이 모여 사는 집성촌 이야기는 생소한 만큼 흥미로웠다. 그는 증조부와 증조모의 행적을 환히 꿰고 있었다. 불현듯 그가 내게 “혹시 증조부의 함자가 어찌되시는지?”라고 물어올까봐 조마조마했다. 조부라면 몰라도 증조부에 대해 들어 기억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1970년 우리가 이사 들어간 집은 당시 집장사로 불리던 이들이 지어 판 양옥집이었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늘어선 집들은 대문의 손잡이 모양까지 비슷해서 가끔 만취한 어른들이 다른 집을 찾아가 제 집 아이 이름을 불러대곤 했다. 그들은 고향은 물론이고 직업이 다 달랐다. 그런 그들이 동네 공터에서 축구를 할 때면 호흡이 잘 맞았다. 아마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일가를 이룬 가난한 가장의 사정을 서로 잘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빚을 내 구입한 그 집값을 갚느라 허리가 휘었다. 하루하루가 팍팍한데 과거를 돌아보고 제 뿌리를 기억하는 일은 여유치 않았을 것이다. 나도 겨우 조부의 함자를 외웠을 뿐이다.
집 안에 내력 있는 물건이라곤 없었다. 아버지의 박봉을 쪼개 월부로 산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부의 상징이었다. 반짝반짝 새것일수록 더 좋았다. 새로 산 냉장고 문을 열어보며 신이 난 어머니 얼굴이 생생한데 지금은 그 골목도 찾을 수 없다. 진작에 골목은 없어지고 그 자리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 선배의 증조부로부터 시작되어 요즘 곳곳에서 증조부란 말을 접한다. 한 달 전 일본 교토에서였다. 우리가 묵은 일본 전통 가옥의 오카미상(안주인)은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증조부로부터 물려받은 옛집을 보존할 방법을 궁리하다가 이렇듯 여행자들에게 개방했다. 6조 소박한 다다미방 곳곳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물건들을 발견했다. 오래된 가구들의 다리는 흠집투성이였다. 부지런한 안주인의 빗자루질에,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장난감에 무던히도 부딪혔던 모양이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의 발디딤판과 손잡이도 얼마나 많은 이들의 발과 손이 닿았는지 반지르르했다.
미국의 한 젊은이가 지하실을 청소하다가 케케묵은 만화책들을 발견했다. 오래전 사망한 증조부의 유품들로 그는 평소 만화를 즐겨 읽었다. 그가 수집해놓은 수십권의 만화들 중 상당수가 희귀본들로 현재 시가로 수십억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내 증조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쩌면 누구를 닮은 건지 알 수 없는 내 기질 중 하나가 바로 그 어른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가끔 나처럼 이유 없이 불안해졌을까. 물론 족보를 찾아보면 함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증조부는 물론 조부의 유품도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우리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이십년 넘은 볼펜? 내가 태어나 맨 처음 목욕했던 ‘스뎅’통? 그러다 생각났다. 우리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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