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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오독의 결과 / 하성란

등록 2012-03-23 19:14수정 2012-03-23 22:36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빨리빨리 책을 읽어야 했다
문장을 음미할 겨를이 없었다
뭐? 쓰레기의 긍지를 높이자고?
오늘 아침에도 책상에 앉자마자 포털에 뜬 사건·사고를 훑었다. 탤런트의 열애 사실도 알고 한 가수의 성형 전후 사진도 보았다. 메인에 떴기 때문에 피해갈 수가 없다. 이렇듯 알지 않아도 될 일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꿰게 되었다.

인터넷으로 기사를 읽게 될 경우엔 댓글까지 읽는 습관이 생겼다. 많은 이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살피면서 사건의 팩트가 더 구체화되기도 한다. 익명 뒤에 숨어 한 사람이 얼마나 적나라해질 수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거리를 두자고 작심했지만 어느 날엔 불쑥 그 밑에 댓글을 달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참는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 내가 너무도 놀랄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한 중견 배우의 고백이 기사화되었다. 그는 가족이 진 채무를 갚느라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가 한평생 바친 연극이 어느 날 그에게 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밑에 달린 댓글들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시비와 조롱조의 어투를 제거한 핵심은 이렇다. ‘어떻게 그런 큰 금액을 4년 만에 다 갚을 수 있는가, 역시 연예인의 수입이란 것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기사를 다시 확인했다. 4년 만에 부채를 갚은 게 아니라 그는 4년 전에야 비로소 그 부채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가 그 금액을 갚는 데 걸린 시간은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이렇듯 많은 이들이 허투루 글을 읽고 있었다. 내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기사의 주인공 심리를 생각하고 그가 되어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일이란 아예 생각도 못할 일이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십수년 전 작가들이 함께한 여행에서였다. 버스의 일회용 머리받이 커버를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곳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문화관광인을 분리수거하여 쓰레기의 긍지를 높입시다.’ 순간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뒷자리에 앉은 내 앞엔 등받이 위로 비쭉 나온 수많은 머리들이 보였다. 한참 선생님들로부터 한두 해 선배들까지, 경망스러운 생각에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쓰레받기에 담겨 분리수거되는 상상도 했다. 다시 그 글을 읽었다. 그 글은 ‘쓰레기를 분리수거하여 문화관광인의 긍지를 높입시다’였다.

그렇게 시작된 오독은 불쑥불쑥 나타났다. 시간은 많지 않았고 하루에도 너무나 많은 신간이 쏟아졌다. 모임에서 누군가 어느 작품에 대해 전문가적인 지식을 늘어놓을 때면 감탄하면서도 불안했다. 빨리빨리 책을 읽어야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할 겨를이 없었다. 하루에 7권의 책을 읽었다는 번역가도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유행했던 속독을 배우다 만 것을 후회했다. 신문을 읽다가도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미망인입니다’라는 문구도 생뚱맞다 싶어 다시 읽으면 ‘실망스러운 일입니다’라는 문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두 손을 들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 중간에 그만두는 책들도 많아진데다 결정적으로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책을 다시 읽었다. 그사이 신간은 내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쌓였다. 거기에 내가 읽지 않은 책들까지 합친다면? 속독가나 다독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신간 이름을 대면, 나 그거 읽었는데, 라고 반짝 눈을 빛낼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몇몇 책들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오독은 없었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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