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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에피메테우스의 변명 / 김별아

등록 2012-04-13 19:02

김별아 소설가
김별아 소설가
방대한 정보 속에 성찰이 없고
무수한 채팅 속에 대화가 없다
똑똑한 폰은 외롭다는 증거다
독수리에게 생간을 파 먹히는 지벌을 감수하면서까지 인간에게 불을 선사한 형 프로메테우스에 비교되는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어리석음의 대명사다. 애초에 프로메테우스가 사고를 친 것도 에피메테우스가 인간을 무능력하게 만들어버린 탓이요, 판도라가 백악을 가둬둔 상자를 연 것도 아름답지만 경망한 그녀에게 홀딱 반한 에피메테우스의 부주의 때문이다. 먼저 생각하는 형에 비해 뒤늦게 깨닫는 에피메테우스는 시쳇말로 ‘민폐 캐릭터’지만, 나는 좀 굼뜨고 모자란 그가 좋다. 아니, 그를 정말 좋아한다기보다 멀미가 나도록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좀처럼 발맞출 수 없는 자신을 신화 속의 어리보기에게 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즈음 외출을 하면 전에 없던 풍경이 눈에 띈다. 버스와 지하철에서 맞닥뜨리는 사람들 중 다수가 자기 손바닥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다. 심지어 거리를 걸으면서도 시선은 손바닥에 꽂혀 있다. 그들의 손에는 ‘휴대전화에 인터넷 통신과 정보검색 등 컴퓨터 지원 기능을 추가한 지능형 단말기’,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해 맞춤형 인터페이스를 구축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자유자재로 주고받는다는데… 내가 쓰는 폴더형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에 대비해 피처폰이라 불린다는 사실도 얼마 전에야 안 나로서는 도깨비에 홀린 듯 어리떨떨할 뿐이다.

초딩들도 스마트폰이 없으면 왕따를 당할 지경이란다. 스마트폰이 아니면 어디 가서 휴대전화를 꺼내기조차 민망하단다. 시대에 뒤떨어지다 못해 시대를 거스르는 골생원으로 취급받지 않으려면 얼른 스마트폰으로 개비해 ‘카톡’도 하고 ‘에스엔에스’(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도 가입해야 한단다. 얼마 전에는 블로그 운영 같은 건 해본 적이 없고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가 “그럼 대체 뭘 하시는데요?”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뭘 하다니… 나름대로 분초를 아껴 열심히 산다고 자부하던 터에 에스엔에스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으니 불쾌하기보다 숫제 허탈했다.

때아닌 복고주의를 주장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필요가 있어 생겨나고, 새로운 만큼 편리할 테다. 하지만 에피메테우스 뺨칠 병아리오줌이라 우세질 당한대도 내 눈엔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커 보이니 어쩌겠는가? 커피숍에 모여 앉은 젊은이 서넛이 잡담조차 않고 각자의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채 열중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대화를 나눌라치면 상대의 스마트폰이 거푸 ‘또롱또롱’ 운다. 그토록 넓디넓은 세계와 소통하느라 눈앞의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진지한 토론 중에 사실의 정확성을 확인한답시고 스마트폰을 뒤지니 입을 열기가 두렵고, 포털사이트 메인화면에 유명인사가 오늘 점심때 뭘 먹었다고 띄운 ‘트위터 멘션’은, 미안하지만, 민망하고 안 궁금하다.

방대한 정보 속에 성찰이 없고, 무수히 오가는 채팅 속에 대화가 없다. 끊임없는 일상 업데이트로 적나라하게 스스로를 노출하지만 정작 누구와도 눈맞춤하지 않는다. 그토록 얼키설킨 소셜네트워크 어디쯤에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게까지 똑똑해질 생각이 없는 내가 똑똑한 폰을 마련해 소셜네트워크 머시기에 몰두하는 날이 온다면, 그건 아마도 너무나 외롭다는 증거에 다름 아닐 테다. 아서라! 이 모두가 에피메테우스의 씁쓸한 변명이려니.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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