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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남아 있는 날들 / 하성란

등록 2012-04-27 19:42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어리석어 훗날을 기약했다.
어리석어 그의 죽음 뒤에야
남아 있는 날들을 헤아려봤다
석 달 전쯤 그를 동창회에서 만났다. 지면에서 그의 이름과 시를 접한 것이 여러 번이라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곁의 누군가가 이렇듯 서로 얼굴을 보는 게 이십년 만이라고 환기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좀 달라 보였다. 마른 것은 여전했지만 말수가 적고 단정했다. 마침 가방에 한 권 남아 있었다면서 그가 자신의 시집을 꺼내 사인해 주었다. 김충규. 20년이란 시간 때문일까, 나는 그가 좀 낯설었다. 그 대신 그의 형이라도 온 듯한 느낌이었다.

학교 근처의 술집 뒷골목, 걸핏하면 남자애들은 시비가 붙었다. 술이 취해 한 덩어리가 된 남자애들 틈에서 얼핏 그를 보았다. 스치듯 지나쳤지만 그 인상이 끝까지 남아 학창 시절 내내 그와는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여느 여자애들처럼 나도 치기 어린 남자애들은 눈에 차지 않았다.

잔이 빌 때마다 그가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정작 그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왁자지껄 목소리들이 커지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집으로 가는 전철 시간에 맞춘다면서 그가 일어섰다. 다음에 책 나오면 꼭 갚겠다는 말도, 나중에 만나면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도 다음으로 아꼈다. 우린 아직 젊고 시간은 많았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헤어졌다.

그를 다시 본 건 그날로부터 한 달여가 흐른 뒤였다. 부고 속에서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영정 속의 그는 얼마 전 만난 그 모습이었다.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이렇듯 갑작스러운 소식으로 달려오게 해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은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을 하는 건 그 때문이다.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아침이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순전히 그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이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날들이 이어졌을 것이다. 머리맡엔 이런저런 소지품들이 널려 있다. 자명종과 혹시나 떠오를지 모를 이야깃거리를 적을 노트와 볼펜, 읽다 만 책, 안구건조증에 쓰는 인공눈물 등등. 급작스럽게 떠난 그의 머리맡엔 무엇이 있었을까.

그가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낼 시집 목록들, 여름호에 발표할 미완성의 시, 벗어둔 안경…… 그는 내일 등교할 아이들에게 당부할 말을 생각하며 잠들었을는지도 모른다. 곁에 누운 아내의 말이 웅얼웅얼 잠결에 묻혔을 것이다. 그의 머리맡에는 내일을 기약하는 것들이 널려 있었을 것이다.

그의 친구이면서 나에겐 선배이기도 한 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가 지금까지 출간했던 잡지를 이어받아 계속 출간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사무실을 정리하다 보니 그 흔한 빚 하나 없다고 그가 말끝을 흐렸다. 인쇄소나 지업소, 디자인실 등 조금씩 묻어둔 외상이 있을 법도 한데, 단정한 그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이십여 년 전 학교 근처의 술집 어두운 뒷골목도 다시 떠올랐다.

그날 내가 본 건 정말 그였을까. 설사 술을 마시고 치기를 부리던 남자애들 사이에 그가 있었다고 해도 그 모습이 그의 전부였을까. 치기 없이 어떻게 그 시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부분을 전부로 알고 말 한 번 붙이지 않은 나는 그보다 한참 더 치기 어렸었다. 나는 어리석었다. 어리석어 훗날의 만남을 기약했다. 어리석어 그의 죽음 뒤에야 남아 있는 날들에 대해 헤아려보게 되었다. 그 어떤 날이 되든 우리맡엔 늘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집 말고도 그에게 또 빚을 졌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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