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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영어강의와 언어통제 / 황현산

등록 2012-05-04 19:11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영어강의의 장점이 약점이다
옆길로 새어나갈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적은 수의 어휘…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인터넷에서 ‘안습’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은 2004년 말이었다. 나는 그 무렵 어느 과학 갤러리를 드나들면서 내가 모르는 과학지식을 눈동냥하고 있었다. 한 토론에서 누군가 ‘안구에 습기가’라는 말을 썼다. 토론 상대자의 말이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난다는 뜻이었던 이 말은 곧 ‘안습’으로 축약되었다. 동남아에 쓰나미가 몰아닥친 것이 그즈음이어서 ‘안구에 쓰나미’라는 말이 생겨났고, 생겨나기가 무섭게 ‘안쓰’로 축약되었다. 이 말의 진화는 두 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만큼 그 말들의 생명도 짧았다. ‘안습’도 ‘안쓰’도 곧 인터넷에서 사라져 이제는 사어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수많은 신어와 축약어들의 운명이 이와 다를 수는 없다. 우리 기억의 깊은 자리와 연결되기도 전에 사라진 말들을 어느 날 우리가 다시 만난다 해도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일은 물론 없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부록으로 딸린 ‘신어의 원리’는 허구의 빅 브러더가 통치하는 저 끔찍한 나라의 언어정책에 관해 말한다. 신어는 그 나라의 공용어이며, 그 창안 목적은 그 체계에 걸맞은 세계관과 사고 습성을 표현하고, 그 국가 이념 이외의 다른 사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이 언어에서는 낱말 하나하나가 단 하나의 뜻만 갖는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모든 개념이 그것을 표현하던 낱말들과 함께 사라진다. 여러 낱말들이 하나의 낱말로 축약되어 본래의 낱말이 지니고 있던 정서적인 힘도 사라진다. 품사의 구별이 없는 이 언어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문장이 없고 개념의 나열이 있을 뿐이다. 문장이 없으니 논쟁이 없고, 하나의 문장이 다른 문장으로 연결될 일이 없으니, 한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발전할 일도 없다. 국가가 제시하는 정통사상이 아닌 다른 생각은 표현될 길이 없을뿐더러 아예 탄생하는 일조차 없을 것이다. 이렇게 언어가 통제되고 사상이 통제된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인터넷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축약어들과 갈수록 단순화하는 문장들을 보면, 저 허구의 빅 브러더가 멀리 있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요즘 거의 모든 대학들이 앞다투어 실행하고 있는 영어강의에 대해서도 같은 염려를 하게 된다. 나는 우리의 여러 대학에 자신의 학문 분야에서 영어로 강의할 능력을 지닌 교수들이 모자라지 않으며, 그 장점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정한 교과 내용을 배우면서 영어도 함께 익히니 도랑 치고 가재 잡기가 따로 없다. 외국어 강의는 교안을 면밀하게 짜야 하니 수업 진행에 차질이 없고, 강의가 옆길로 새나가기 어려우니 아까운 시간이 허비되지 않을 것이다. 강의가 한국어에서 벗어나니 외국 학생들을 불러오기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강의의 이 모든 장점은 그 약점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적은 수의 어휘만을 사용하여 교안에 충실하게 진행되는 외국어 강의는 학생들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옆길로 새나갈 수 없는 강의는 삶과 공부를 연결해주는 온갖 길들을 차단할 것이다. 언어의 깊이가 주는 정서를 학문의 습득과 함께 누리지 못하는 탐구는 모든 지식을 도구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강의가 사상통제를 위해 실행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상통제의 필수조건인 언어통제가 그 가운데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염려한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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