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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말하는 남생이 말하는 매실 / 김별아

등록 2012-05-11 19:26수정 2020-08-06 11:07

영혼의 문을 두드리는 일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잃지 않고
말 역시 잃지 않는 지혜 배울까

어쩌다 팔자에 없는 강연과 방송 출연을 더러 하게 되면서 일찍이 신경 쓰고 살지 않던 결함이 콤플렉스가 되어버렸다. 글이 아닌 말로 사람들을 만나노라니 부정확한 발음이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로 등장한 것이다. 아무러해도 혀짜래기소리가 귀엽지 않은 나이에 조금은 진중히 보이고 싶어 혀 운동을 자유롭게 해준다는 설소대 수술이라도 해볼까 고민했다. 그때 인터넷으로 비용과 부작용 등을 검색하며 엉두덜거리던 내게 동생이 던진 촌철살인의 한마디.

“말을 잘하고 싶다고? 이젠 말을 줄여야 할 때가 아닌가?”

어뿔싸!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인생 선배들의 조언을 누누이 들었음에도, 하마터면 도취가 부른 착각으로 구업을 보탤 뻔했다. 생리적인 노화와 별개로 마음이 늙으면 말도 늙는다. 새로운 생각이 줄어들면 중언부언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공감과 배려가 퇴화하면 결국 자기자랑으로 끝나는 말들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어떤 말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체가 아무 실속 없는 ‘말하는 매실’과 믿지 못할 ‘말하는 남생이’가 될 만한 징조다. 우연히 맞은 죽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야흐로 막말과 궤변과 요설의 시대다. 입만 열면 꿈에 먹은 떡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허언증 환자에겐 질릴 대로 질렸다. 그 꼴 같지 않은 꼴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창조적인 상욕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괴물과 싸운다며 똑같은 괴물이 될 수는 없다. 함부로 속되게 말하고 쓸데없이 말해 설화에 휩싸인 사람들을 보노라면 <논어>의 일절이 떠오른다. 공자는 “함께 말할 만한 사람과 더불어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함께 말할 만하지 않은 사람과 더불어 말하면 말을 잃는다”고 하셨다. 사람을 잃고 말까지 잃는 어리석음 속에 뒤엉켜 버글거리기가 괴롭고 부끄럽다.

이런 때에 마침 아나운서 ㅇ씨가 말의 벽(壁)과 문(門)에 대해 다룬 산문집을 보내왔다. 책을 읽노라니 글을 ‘잘’ 쓰는 비법이 없듯 말을 ‘잘’ 하는 법도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말할까 궁리하기보다는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를 먼저 고민하면, 절로 입이 무거워진다. 말이란 ‘영혼의 문을 두드리는 일’임을 깨달으면, 유창한 달변보다는 가만한 경청이 소통의 첫걸음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영영 반벙어리로 살 수는 없을 터,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잃지 않고 말 역시 잃지 않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까?

ㅇ씨에게 소개를 받아 비염에 걸린 아이를 데리고 침술원을 찾았다. 근육이 뭉친 손님을 진찰하며 “뭉쳐야 사니까 여기라도 뭉치는 거죠”라고 말하고, 진료가 끝나면 “다음에 꼭 봐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침술사 아저씨’는, 절대맹(絶對盲)의 시각장애인이다. 따끔한 침과 함께 따뜻한 말로 사람을 치료하는 그에게 나는 ㅇ씨와 마찬가지로 진료실 밖의 봄꽃을 ‘어떻게 들려드릴 수 있으려나’ 고민했다. 눈부신, 폭죽처럼 터지는, 불을 켠 듯 환한…… 따위의 말을 곱씹다가 마침내 ‘박하사탕처럼 화한’이라는 표현을 찾아냈을 때, 나는 비로소 말을 ‘잘’ 한다는 게 무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일지라도 듣는 이가 주인일지니, 말은 타인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받는 데 쓰일 때에야 뜻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의 목적인 동시에, 금 같은 침묵을 사랑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야 할 이유이리라.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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