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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첫 꽃을 버리며 / 황선미

등록 2012-05-18 19:02

황선미 동화작가
황선미 동화작가
가지에 피어난 단 하나의 꽃
기특하고 가슴저린 꽃
떨렸다. 따버려야 한다
복숭아가 좋아.

황토밭에 육즙 풍부하고 향기로운 품종으로 복숭아나무를 심기로 한 이유는 이처럼 단순했다. 봄마다 복숭아꽃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유통 기간이 짧은 과일이니 저장고를 안 써도 되고, 복숭아 좋다는 사람 많으니 팔기 수월할 것이고, 상품가치 떨어지는 지스러기조차 통조림으로 갈무리하면 되니 재고 따지고 할 생각조차 없었다.

환상은 묘목을 보는 순간에 당장 깨져버렸다. 기껏해야 부지깽이 정도의 맨숭맨숭한 나뭇가지. 내 현실은 접붙인 어린 묘목이건만 오래전 취재 갔던 장호원의 복숭아밭을 상상했으니 얼마나 앞서갔는지 어이가 없다.

자그마치 육십 그루나 줄 세워 꽂았건만 먼발치에서는 대체 묘목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도 안 되었다. 거기에 꼬챙이 같은 묘목이 있다는 건 북을 준 흔적으로나 짐작할 뿐. 초보 농사꾼의 소망처럼 일정 간격으로 착실하게 다독여진 북. 작물은 농사꾼의 발소리를 먹고 자란다며 조석으로 살피는 남편이 가엾어질 만큼 묘목의 눈에는 변화가 없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도 걷게 되고, 뭐든 빨리 해결돼야 안심하고, 자라지도 못한 아이에게 어른을 상상하는 사회의 일원이다 보니 이 더딘 진행이 암담하기까지 했다.

내 사정이야 어떻든 복숭아나무에게는 복숭아나무만의 시계가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조차 새로 배워야 할 일이었다. 눈 뜨기 어려운 나무의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갓 시집온 여자처럼 힘겨운 게 당연하다. 어린나무들이 느닷없이 몸뚱이가 잘린 일도, 다른 삶이었던 두 나무가 하나의 물관으로 이어지는 일도, 이 낯선 땅을 견디고 뿌리 내리는 일도 얼마나 버거울 것인가. 뿌리째 고스란히 옮겨 심은 나무도 몸살의 시간이 있거늘.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이고 삶이 거듭나는 과정이니 그저 죽지 않고 견뎌내 주기를 바라는 게 먼저였다.

오랜만에 봄비가 내리던 날, 새삼 깨달았다. 비가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세례인지. 잎눈도 꽃눈도 여전히 딱 붙어 아무런 변화 없지만 나뭇가지에 물오른 게 만져졌다. 푸릇한 느낌. 생기가 돈다. 살아있구나.

실금처럼 눈이 벌어지더니 앙증맞은 망울이 잡히고 드디어 조심스러운 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줍은 인사처럼 너무나 조용히 자라나는 잎사귀. 아, 생명은 이렇게 세상에 오는구나. 아기 손처럼 어리고 촉촉한 잎사귀를 손끝으로 잡고 악수했다. 반가워. 와줘서 고맙다. 너, 진짜로 복숭아나무네.

일이 있어 서울에 왔다가 휴대전화로 사진을 전송받았다. 분홍색 꽃봉오리 하나. 어떤 설명도 없으나 보낸 사람의 뿌듯함을 알기에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미 나는 무릉도원 같던 장호원의 복숭아꽃 무더기를 내려놓은 지 오래. 안타까운 기다림 없이는 꽃도 열매도 나에게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다.

꼬챙이 같은 나뭇가지에 피어난 단 하나의 꽃. 이렇게 기특하고 가슴 저린 꽃은 처음이다. 이 맨숭맨숭한 나무 속 어디에 이런 기억력이 숨어 있었을까. 안도하는 숨결 같은, 첫사랑의 설렘 같은, 분홍색의 완성 같은 꽃을 드디어 보는구나.

손끝이 떨렸다. 혼신을 다해 피었을 첫 꽃이건만 따 버려야 한다. 아직은 키가 자라야 할 때, 아직은 굵어져야 할 때, 아직은 뿌리를 뻗어야 할 때라서. 너무 일찍 어른인 척하지 말고 충분히 자라라고.

첫 꽃을 버리며 기원한다. 튼실한 나무 되어라. 좋은 열매들의 어머니가 되어라.

황선미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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