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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편의점에 간다 / 하성란

등록 2012-05-25 18:59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늘 알바생이 있던 편의점에
사장님이 나타나더니
그 자리에 미니슈퍼가…
아이의 어린이집이 있는 골목 끝에 편의점이 있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으로 들여보낸 엄마 아빠들이 편의점 파라솔 아래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곤 했다. 종종 편의점에 물건을 대는 물류회사의 대형 트럭이 길을 막고 서 있어 몇 번 경적을 울린 적도 있었다. 어느 날 그 편의점이 사라졌다.

우리나라엔 현재 2만여곳의 편의점이 있다고 했다. 사라진 한 개의 편의점 수를 메우려는 듯 사무실 바로 앞에 또 한 개의 편의점이 늘어났다. 이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예전부터 있던 편의점과 새로 생긴 편의점이 삐딱하게 마주서 있다. 점점 느는 편의점 수로 이곳의 유동인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편의점에서 구입하는 건 일주일치의 장이 아니다.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담배 등과 같은 소소한 물건이다. 문득 신고 있는 스타킹 올이 풀린 걸 발견한다 해도 걱정할 것 없다. 바로 코앞에 편의점이 있으니까.

편의점의 등장은 신선했다. 지금처럼 편의점이라 부르지 않고 꼭 ‘24시간 편의점’이라고 불렀다.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동네 미니슈퍼와는 외형부터 달랐다. 산만한 진열대 위로 자꾸 쌓여가는 물건들 때문에 발 디디기도 힘들던 가게와는 달리 편의점엔 우리의 취향을 고려한 물건들이 산뜻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슈퍼 아저씨라면 음료수 상자들을 쌓아둘 자리를 과감하게 고객에게 할애했다. 미니 바에서 우리는 컵라면과 어묵 같은 즉석식품들을 먹었다.

밤새 영업한다지만 늦어도 전철 막차를 타야 했기에 새벽의 편의점을 볼 기회는 없었다. 그 무렵 학생들의 습작품 속에 편의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벽 세 시 편의점에 들러 담배 한 갑을 샀다. 잠을 자지 못한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이 형광등 불빛 같았다.’ 몇몇 학생들이 겉멋이 잔뜩 든 문장이라고 지적했다.

새벽의 편의점을 본 건 몇 년 뒤였다. 잠든 가족을 깨우지 않으려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편의점 불빛은 따뜻했다. 잠들지 못한 이들이 거기 있었다. 깊은 밤에도 깨어 있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두 개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껌을 샀다.

사무실 일층의 편의점을 가장 많이 들르는 건 가깝기 때문이다. 그걸 편의점 사장님은 단골로 생각하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편의점엔 늘 아르바이트생들이 있었다. 편의점 주인과 일대일로 마주치지 않았다. 물건을 사고 값만 지불하면 되었다. 불쑥 들러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와도 눈치 줄 이 없었다.

어느 날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계산대 앞에 서 있다가 과자를 사는 우리 아이를 보고 “귀엽게 생겼네”라고 한마디 했다. 아르바이트생 대신 주인이 나와 있다는 건 인건비라도 줄여보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얼굴을 익혀 이젠 가게 밖에서 사장님을 만나도 인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건너편 편의점 때문에 매출이 준 건 아닐까 괜한 걱정도 하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눈에 띄는 편의점에 마음 편히 들르지도 못한다. 이래선 편의점이 아니다, 거리를 두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출근한 사모님과도 인사를 나누고 말았다.

아이의 어린이집 편의점 자리에 들어선 것은 다름 아닌 미니슈퍼이다. 아주머니 한 분이 의자에 앉아 놀러 온 이웃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물건 진열도 조명도 영락없는 미니슈퍼이다. 골목에 돌아온 미니슈퍼의 힘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편의점을 접고 떠난 전 주인이 떠올랐다.

지금도 어디선가 하나의 편의점이 없어지고 또 하나의 편의점이 늘고 있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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