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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깃발 / 하성란

등록 2012-06-22 19:15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배너 창은 알고 있었다
내가 이전에 검색했던 것들을…
펄럭거리며 내 욕망을 보챈다
십수 년 전 쓰레기봉투를 뒤진 적이 있다. 쓰고 있던 단편소설의 주인공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밤 몰래 다른 사람이 버린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욕조에 풀어놓고 버린 것들을 수첩에 꼼꼼히 적었다. 비위가 상할까봐 우리 집 쓰레기봉투부터 착수했다. 다시 풀릴 걸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매듭이 참 야무지게 묶여 있었다. 늘 덜렁대는 내게 이런 면이 있다니, 겨우겨우 매듭을 풀고 현관에 깔아둔 신문지 위에 부었다. 20리터 봉투라는 것이 의심될 만한 양의 쓰레기가 쏟아졌다. 다른 것에는 그렇게 돈을 쓰면서 고작 쓰레기봉투 값이나 아끼는 ‘나’의 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성격이 야무져서라기보다는 너무도 눌러넣어 자칫 포화 상태에 이른 쓰레기가 터져나올까 그렇게 단단히 묶었던 것이다.

살을 발라 먹은 닭뼈나 양파 껍질 등은 벌써 부패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깨끗한 것들도 오염되어 모든 것은 그저 한 뭉텅이의 쓰레기에 불과했다. 언제 이런 걸 샀지? 이 상표를 좋아했나? 쓰레기가 말하고 있는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와는 좀 달랐다. 은연중에 구입했다고 생각한 물건들도 의식을 하고 구입한 듯 규칙들이 있었다. 그러니 쓰레기장을 조사해 그곳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상품 생산에 이용하는 ‘가볼로지’라는 학문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뒤로는 쓰레기도 신경써서 버리게 되었다.

하루를 같이하는 노트북 컴퓨터(랩톱)가 또다른 쓰레기봉투라는 걸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랩톱으로 일을 하다 보니 우리 가족은 개인 소유의 랩톱이 따로 있다. 지갑처럼 사적이고 개인적인 물건이 되어 남의 랩톱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일을 하는 중간중간 수시로 물건들을 검색하고 구입한다. 가격 비교 사이트에 들어가 좀더 싼 곳의 물건을 고르다 보니 여러 쇼핑몰의 회원이 되었다. 개인정보 활용도 허락했다. 그러지 않으면 물건을 구입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문득 모니터 한쪽에서 반짝이는 배너 창에 눈을 주게 되었다. 거기 마침 요즘 한창 관심을 주고 있는 구두가 떠 있었다. 비교하기 쉽도록 유사한 디자인의 구두들을 친절히 모아놓기까지 했다. 어떻게 내 마음을 다 알았을까, 냉큼 접속했다.

며칠 뒤엔 화장품이 떴다. 그 며칠 뒤엔 옷걸이와 방충제가 떴다. 어떻게 내가 필요한 것만 꼭꼭 집어 알고 있는 걸까. 그러다 알게 되었다. 이런저런 경로로 내가 한번쯤 검색했던 항목들이었다는 것을. 배너 창은 깃발처럼 펄럭이면서 가까스로 눌러두었던 내 욕망을 극대치로 밀어올린다. 수시로 나타나 피해갈 수도 없다. 내가 그 물건을 구입하기 전까지 깃발은 계속 펄럭일 것이다.

대체 어떤 경로로 검색한 상품이 다시 뜨게 되는 걸까. 게다가 온전히 한 개인을 위한 광고이다. 배너 광고를 연관 검색어로 디비(DB)마케팅이 뜬다. 포털에서 검색한 항목들에 대한 정보가 수집되어 판매자에게 공개되고 판매자는 잠재적 구매자들 하나하나의 구미에 맞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다.

관심 상품뿐 아니라 랩톱에는 검색했던 정보와 찾아본 영어 단어들까지 뜬다. 창피스러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찾아본 항목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내가 배너와 디비마케팅에 대해 검색한 것까지 알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에게 다시는 휘둘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알아 상품을 팔기 위한 다른 방법을 고안중일지도 모른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욕망의 마음을 맨 처음에 포털에 달 줄 안, 그는.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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