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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물의 순리 / 박혜령

등록 2012-07-06 19:01

박혜령 농민
박혜령 농민
계곡물은 산삼 썩은 물이래
높이 오르려는 오만의 물줄기는
오직 인간만이 만들려고 하지
봄날엔 겨우내 움츠렸던 개구리들이 생명을 잉태하고, 더운 여름엔 고라니 한 가족이 더위를 식힐 정도의 작은 나무그늘을 만드는 예쁜 실개울이 흐른다. 우리 동네는 계곡 안에서 평지가 시작되는 입구쯤에 흐르는 물소리가 적당히 좋은 개울 옆으로 한두 가구 집들이 드물게 자리잡은 한적한 곳이다. 나무들은 도시에서 수많은 고층빌딩과 사람들 틈에 장식품처럼 서 있지만, 내가 사는 곳에선 넓은 하늘 아래 우연히 자리한 집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다. 올해엔 더위가 유난히 일찍 찾아온데다 비마저 오지 않아 농부들의 마음이 타들어간다. 비가 적은 해엔 산의 나무색도 다르다. 풍요로운 녹음이라기보다 초록 기운을 억지로 버티는 것이 눈에 확연하다.

물이 말라 하늘만 바라보는 와중에도 실개울 낮은 곳엔 어김없이 손바닥만한 물이 고이고 좁은 웅덩이에도 피라미 같은 생명들이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장마철이라 다행히 오늘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아직 웅덩이의 물이 가득 차서 아래로 흘러넘칠 정도는 아니다. 천연암반이 개울 밑을 떠받치고 있는 너럭바위 빨래터를 유달리 좋아하는 나는, 비가 오지 않아 빨래를 하기 힘든 날에도 장갑 한 장이라도 들고 아침저녁으로 실개울을 찾는다.

그곳은 아마도 밤이면 고라니, 너구리, 오소리 같은 무수한 친구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너른 품일 것이다. 물이 부족할수록 땅 밑으로, 나무 아래로, 개울 한 귀퉁이로,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이치가 없이는 장갑 하나 씻을 빨래터는 물론 산속 친구들이 마른 목을 축일 샘터도 없을 것이다. 한여름 더위가 절정에 이를 때면 깊이 고여 여러 물고기 가족들이 사는 곳에 온몸을 던져 뜨거운 태양을 피할 곳이 있어 산골 생활은 행복하기만 하다.

산골 사람들은 계곡물을 ‘산삼 썩은 물’이라고 부른다. 딸은 이 말에 흐느적거리며 웃어대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그 물은 소중하게 먹고 다루는 생명의 젖줄이며 상징이다. 산속 나무며 식물들이 생명의 기운으로 만들어낸 것이 이 물이라 생각하고, 이 물을 공유하는 것은 곧 ‘생명의 연대’ 안에 우리들 자신이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공감의 말이기도 하다.

산속의 생명체들은 그렇게 숨쉬는 순간마다 온몸으로 삶의 연결과 연대를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좀더 낮은 곳으로, 그리고 종국엔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의 이치에 제 몸을 맡겨 흘러가고 고이고 다시 흘러가는 물은 마지막 가장 낮은 곳에서 높낮이 없이 만나 섞이고, 연대하고, 서로를 보듬는다. 뭍 생명들이 누리는 물에 높고 낮음이 없고, 맑고 탁한 원류의 구분이 없이 순식간에 섞이는 과정은 자연 속 생명들의 만남과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자연의 최선의 가치가 물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낮은 곳으로 쉼 없이 향하는 그 이치 때문일 것이다. 높은 곳을 오르겠다는 오만한 물줄기는 인간만이 만들 수 있고, 인간만이 추구한다. 우리네 시선도 물처럼 다시 아래로 향하여 생명 본연의 낮은 곳으로의 귀환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도 ‘낮은’ 곳에서 몸을 부딪고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보듬는, 삶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여정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생명으로서의 몸짓이 아닐까? 비가 오고 다시 웅덩이가 만들어지는 장마의 문턱에서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 본다.

박혜령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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