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언론인
사람이 여느 동물과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요즘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하나는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자를 보호하는 마음이다. 동물은 부끄러움을 모르니 아무데서나 ‘그 짓’을 하고,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보기만 하면 잡아먹는다.
이런 동물과 달리 사람은 부끄러움을 알기에 절제를 하고, 그래서 사회의 도덕과 윤리가 유지된다. 그리고 약육강식의 동물과는 달리 나보다 못한 사람, 사회적 약자에 대해 측은지심을 가짐으로써, 이들을 보호하고 도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룬다. 인류가 그 방향으로 가면 진화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약자를 짓밟고 탐욕스럽게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 한다면 동물의 세계로 퇴화하게 된다. 그렇기에 강자,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을 제어하는 장치가 필요하고, 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적 약자를 적극 배려하는 것은 강자에게 집중된 힘을 분산시키는 방법 중 하나다.
지난 4년여 동안 참 많은 일이 벌어졌다. 정치검찰이 그렇게 온갖 배려를 해주는데도 이명박 대통령 주변의 핵심 측근들은 줄줄이 부패와 비리로 구속되고 있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질러놓고도 도무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어쩌다 재수 없어 걸려들었다는 표정들이다.
거기에다 비밀리에 한-일 군사정보협정을 맺으려다 들통나서 벌이는 작태를 보면, 특히 자신은 아무 관련도 없다는 듯이 그냥 관전평 하듯 아랫사람들만 나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멘붕 상황을 보면, 책임 이전에 도대체 부끄러움조차도 모르는 것 같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면서도, 우리 사회를 약육강식의 정글처럼 만드는 일에는 참으로 용감했다. 강자와 가진 자를 위해서는 세금도 깎아주고, 규제도 풀어주고, 조·중·동 종편처럼 더 많은 것을 듬뿍 안겨주기도 했다. 그런 일방적인 편애의 결과로 사회는 더욱 혹독한 부익부 빈익빈을 겪게 되었다.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고, 효율과 경쟁의 이름으로 폐허처럼 되어버린 곳은 또 있다. 교육과 취업의 세상, 바로 젊은이들 삶의 현장이다. 평생을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참혹한 학벌사회의 차별구조는 더욱 공고해졌다. 젊은이들은 껍데기 ‘경쟁력’에 지나지 않는 스펙을 쌓느라 꿈을 잃어버렸다. 경쟁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친구들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감에 짓눌려 있다.
그런 조건에서 학벌사회의 차별구조는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 평생을 보장해주는 학벌사회 사다리의 맨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기를 쓰기 마련이다. 대학은 대학대로 미쳐 있어서, 경쟁력을 높인다며 서열화에 몰두한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사회적 약자들이 양산된다.
이 지독한 차별을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공정한 기회’를 실현할 방법은 없는 걸까. 있다. ‘약자 보호 정책’(어퍼머티브 액션)이다. 사회적으로, 구조적으로 차별받는 약자들을 적극 보호해주는 정책이다. 사회적 약자에게 할당제를 통해 적극적으로 기회를 부여하면 된다. 기계적 경쟁논리로만 접근하면 4대강 공사에서 대기업 건설사들이 독점하듯 강자만 독식하여 강자 독점 체제가 더욱 강화된다.
그리고 취업과 관련하여 학벌 차별을 근원적으로 해소해주는 방안은 ‘블라인드 심사’이다. 출신 지역, 출신 학교 등 차별요소에 눈을 감아 버리면 기회의 측면에서 학벌로 인한 차별은 사라진다. 미국 등에서 그 사회의 심각한 차별요인이 되는 인종·종교 등을 아예 기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학벌이 가장 심각한 차별요인이니 그것을 드러나지 않게 하면 된다.
2년 전 이 칼럼에서 나는 한국방송 사장 재임 5년여 동안 실제로 집행한 ‘블라인드 심사’와 ‘지방대 할당제’가 어떤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는지 쓴 적이 있다. ‘블라인드 심사’는 이른바 3대 명문대학의 독점체제를 허물었으며, 그게 무너지자 기회가 그밖의 다른 대학으로 밀물처럼 흘러넘치는 결과가 나왔다. 학벌에 눈을 감아 버리니 이처럼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정연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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