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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꿈, 백일몽, 그리고 악몽

등록 2012-07-18 19:16수정 2012-07-18 21:25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바야흐로 꿈의 세일즈 기간이다. 온 천지에 꿈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다. 꿈을 파는 가게들이 잇따라 문을 열고 손님들을 향해 손짓한다. 주로 서울 여의도에 밀집해 있는 이 가게들은 회사와 제품명은 조금씩 다르지만 다루는 품목은 똑같다. 미래의 행복과 변화의 아름다운 꿈을 앞다투어 판다. 아예 간판부터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크게 써붙인 곳도 있다.

‘꿈’을 내세운 각종 카피는 따지고 보면 미국의 마틴 루서 킹 목사에게 지식재산권이 있다.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를 원조 삼아 끊임없는 변용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꿈은 간결하고도 명료했다. “내 자식들이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품성에 의해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만큼 절절한 꿈이 어디 있는가. 그 꿈은 간결하기에 진정성이 더했고 소박하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킹 목사에 비하면 후세의 꿈 판매업자들이 내세우는 꿈은 외양은 세련됐으나 감동은 덜하다.

여의도에 생겨난 꿈을 파는 가게들 중 규모나 인지도 등이 으뜸인 곳은 단연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다른 곳이 구멍가게 수준이라면 이곳은 화려한 백화점이다. 다른 가게에서는 꿈을 몇 가지만 낱개로 판매하지만 이곳은 ‘모든 꿈’을 아예 박스로 판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은혜로운 땅’을 약속한다. 나에게 투표하라, 그러면 모든 꿈이 이루어질지니! ‘저녁이 있는 삶’이 꿈인 고객에게는 저녁을, ‘평등한 국가’가 꿈인 자에게는 평등을, ‘빚 없는 세상’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빚 탕감을 제공하겠노라. 이러니 다른 가게들은 횃불 앞의 촛불이요, 굴착기 앞의 삽이다.

그런데 왠지 미심쩍다. 가만히 살펴보니 이곳은 예전에 ‘잘살아 보세’ 꿈을 팔았던 바로 그 가게다. 주인이 바뀌고 실내 장식을 새로 꾸몄지만 매장 직원들부터 거의 낯익은 얼굴들이다. 부실 제품을 속여서 팔고 부도까지 낸 가게가 간판만 바꿔달고 장사를 하는데도 손님이 북적이니 참으로 신묘하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희망은 백일몽이다’를 비롯해 꿈의 찬가는 동서고금에 넘쳐난다. 하지만 꿈은 역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은 여전히 남루하고 초라하다. 꿈을 일찌감치 포기하도록 만드는 사회경제적 구조는 날이 갈수록 더욱 숨이 막혀온다. 그리고 이 땅의 힘없는 자들의 꿈을 꺾는 데 앞장서온 게 바로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계열사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난 5년 가까운 세월 새로운 꿈을 이룩하기는커녕 있는 꿈마저 억눌렀다. 우리 사회가 소중히 키워온 민주주의의 꿈, 경제 민주화의 꿈, 남북평화의 꿈을 철저히 짓밟았다. 아니, 꿈의 실현은 고사하고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마저 금지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가 꿈에 색깔을 입히고 ‘특정 꿈 금지령’을 내렸다.

꿈 가게를 새로 인수한 지금의 주인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꿈의 침탈에 대부분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그럼에도 예전에 반대하던 남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만들어 꿈 이야기를 들고나오니 참으로 어지럽다. 그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꿈 이야기의 진정성을 알려면 오지 않은 미래의 꿈을 가불하는 것보다 지금의 꿈 문제부터 살피는 게 빠르다. 그리 거창한 꿈도 아니다. 정치 편향에 물든 검찰이 개혁돼 바로 서기를 바라는 꿈, 공정보도를 향한 문화방송 파업 노동자들의 절실한 꿈, 5·16은 쿠데타이며 유신헌법은 잘못된 헌법이라는 상식을 공유하기 바라는 꿈 등 참으로 소박한 꿈들이다. 하지만 꿈 가게 주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의 모든 꿈의 충족’을 말한다.

백일몽은 자신에게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직간접적으로 충족되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과정 또는 그러한 꿈을 말한다. 일종의 도피현상이다. 꿈을 파는 가게한테서 ‘백일몽 세일’을 연상하는 이유다. 차라리 백일몽은 낫다. 또다시 가위눌리는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은 어찌된 연유인가.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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