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시인
시간의 흐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눌 때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단연 미래입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의 확실성에 비해 미래는 불확실하니 어떤 사람의 미래를 점치는 근거는 그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사람은 변하는 것 아니냐, 어제까지 악행을 저지르다가도 내일부터 선하게 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스스로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참으로 변하겠다고 마음먹고 노력하는 사람만 변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지난 월요일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박근혜 의원 때문입니다. 박 의원은 그날 기자회견에서 5·16 쿠데타와 유신과 관련해 “과거로 자꾸 가려고 하면 한이 없다”고 말하고, 장준하 선생 타살 조사에 대해서는 “조사할 게 더 있다고 하면 해야 되겠지만 저는 우리 정치권이 미래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박 의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이 저 하나는 아닐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정치인 중 가장 과거지향적인 분이 “과거로 가려면 한이 없다, 미래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니 말입니다.
박 의원의 말에서 일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도 저 하나가 아닐 겁니다. 지난 세기 초 한국인을 상대로 저지른 잔인무도한 식민지배에 대해 진실하게 사죄하고 보상하라고 하면, 일본 정부는 또 과거 타령이냐고, 이제 과거 얘기 그만하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를 잊고 미래로 가자는 말은 가해자가 하면 안 되는 말입니다. 그건 가해자가 진심으로 뉘우치며 사죄할 때 피해자가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5·16 쿠데타, 유신, 장준하 선생 얘기 같은 과거사를 자꾸 들먹이는 건 박 의원이 자기 아버지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아버지 편을 들기 때문입니다. 박 의원은 지난달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은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여 5년 전 ‘구국의 혁명’이라 했던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 발언으로 지지율이 하락하자 5·16은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말을 바꾸었지만 그의 속내를 모르는 국민은 없습니다. 12월 대통령 선거가 임박해서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뭐라고 하든, 그가 아버지 박정희씨의 정신적 아바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박 의원이 대통령 후보가 되니 그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것인지를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으로 출범한 후 줄곧 남성 대통령만 나왔으니 이제 여성 대통령이 나올 때도 되었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여성 대통령을 바랍니다. 아무개의 딸이라는 최초의 정체에 갇혀 나이가 들어서도 ‘딸’로만 살려는 여성이나 권력가 집안에 태어나 권력 없는 삶의 비애를 짐작도 못하는 여성 말고, 남성과 동등하게 이지적이며 어떤 남성에게도 뒤지지 않는 경험을 쌓은, 미래지향적인 여성, 아니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래는 과거에 출발한 기차의 목적지입니다. 엉뚱한 길로 간 기차가 제 목적지로 가려면 잘못 갔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박근혜 의원이 자신이 원하는 미래로 나아가는 길은 ‘독재자의 딸’이라는 과거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잘못을 막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해원을 돕는 데서 출발합니다. 여성 대통령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올해엔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김흥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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