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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내 어릴 적 운동회의 추억 / 호인수

등록 2012-09-07 19:18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그날, 충북 충주시 교현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아침부터 파란 하늘 아래 오색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고마우신 이이 대통령 우우리이 대통려엉” 노래를 배워 부르면서 이승만을 찬양하던 시절이었으니 1960년 이전이었던 건 분명하다. 시골의 초등학교 운동회란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과 그 가족들, 지역의 어른들까지 한데 모여 1년에 한 번씩 벌이는 큰 잔치마당이다.

오후에 운동회가 거의 파할 무렵 릴레이 경기였다. 나는 운 좋게 청군(백군이었나?)의 학년 대표 선수로 뽑혔는데 몇 번째 주자였는지는 생각이 안 난다. 양 진영의 응원가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나는 바싹 긴장된 얼굴로 출발선에 섰다. 드디어 이마에 파란 끈을 동여맨 내 앞의 주자가 바통을 들고 내게 달려오는 게 저만큼 보였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와 내 옆의 아이가 거의 동시에 바통을 이어받고 우리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씩 뒤처진다고 직감적으로 느낀 것은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기를 썼지만 한 발짝 정도 앞선 상대 아이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순간, 나는 전혀 뜻밖에 엉뚱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 바통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을 뻗쳐 앞선 그 아이의 한쪽 어깨를 잡아 뒤로 젖히면서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사방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결국 나는 상대보다 먼저 바통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마침내 우리 편이 이겼다.

맹세코 그때 나의 행동은 백 퍼센트 우발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계획적으로 반칙을 할 만큼 영악한 나이는 아니었으니까. 릴레이 경기에서 이기고 상으로 공책을 탈 때까지도, 아니 그 훨씬 뒤까지도 나는 나의 행위가 명백한 규칙위반이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내가 잘했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구경꾼들이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는데 반칙이었다면 심판관인 선생님이 못 봤을 리가 없다. 절대로 내가 속인 게 아니다. 내가 양심고백을 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음은 당연했다. 그 후로 나는 오랫동안 그 일을 잊고 살았고, 잊고 살았으니 떳떳했다. 그때는 그랬다.

그래도 내게는 몇 가지 의문점이 여전히 남는다. 어떻게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순간적으로 나를 홀린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어렸을 적부터 오로지 1등에만 눈이 멀었던 인간이었나? 왜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내 잘못은 모르고 상을 탔다는 자랑스러운 기억만 남았을까? 그 상은 지금 흔적도 없다. 선생님은 왜 즉시 호루라기를 불어 나를 퇴장시키지 않았을까? 우리 아버지는 그날 본부석 천막에 앉을 만큼 학교에 공을 세운 분도 아니고 지역 유지도 아니었다. 구경꾼들은 정말 나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라고 판단한 걸까? 그래서 박수를 쳤나? 얄밉기 짝이 없는 못된 내게 왜 돌을 던지지 않았나? 나 때문에 2등 한 아이는 억울하다고 항의했을까? 그 아이도 지금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벌써 50년도 더 넘은 어릴 적의 옛날 일이 언제 어떤 연유로 내 머리에 각인되어 오늘까지 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아무도 나를 잘못했다고 단죄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날의 과오를 ‘없던 일’로 덮을 수는 없다는 것을 천만 다행스럽게도 지금 나는 안다. 솔직히 나는 부끄럽다. 못할 짓을 한 것이다. 다만 이제라도 모교에 가서 선생님과 아이들 앞에서 그때는 내가 잘못했노라고, 그럼에도 나는 잘못인 줄도 몰랐노라고 고백하고 예쁜 공책을 몇 권이 아닌 몇 상자 사드리고 싶다.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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