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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멀리서 반짝이는 / 하성란

등록 2012-09-14 19:04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어릴 적 아버지는 곧잘 내 손을 잡고 남산에 갔다. 대여섯살 계집아이에게 남산을 오르내리는 일은 힘에 부쳤다. 나중에는 아예 따라가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렸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다른 곳에 간다며 꾀를 부렸다. 남대문과 명동, 정말 다른 곳에 가는 줄 알고 신이 나 있던 나는 매번 귀신에라도 홀린 듯 남산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서 있곤 했다.

왜 그렇게 아버지는 남산에 갔던 걸까. 룸펜 생활이 길어지던 때였다. 벌건 대낮에 집에서 빈둥대는 남자는 금방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샀다. 지금처럼 공원이 많지도 않을 때니 아는 이의 눈을 피해 갈 곳이란 남산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소심해 혼자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다. 남산에 갈 때마다 아버지는 아이와 소풍 나온 사람처럼 굴었다. 아버지가 벤치에 앉아 신문을 펼쳐놓고 ‘사업 구상’이라는 걸 하는 동안 나는 놀이터의 기구들을 옮겨다니며 하얀 타이츠에 여러 겹의 먼지 줄이 생길 때까지 놀았다.

아스라이 펼쳐지던 풍경들이 사라지고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일 무렵 슬슬 일어섰다. 1970년대 초 서울은 만원이었다. 아버지도 자신의 꿈을 좇아 무작정 상경한 이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산 아래 점점이 박혀 반짝이는 불빛들을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반짝이는 수많은 불빛 중 우리 집은 어디일까. 배도 고프고 피곤이 몰려와 어린 마음에도 쓸쓸해졌다. 불빛은 저렇게 많이 반짝이는데 어디에도 자신의 집 불빛이 없다는 것에 젊은 아버지는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몇년 뒤 우리는 이사를 했다. 세간은 단출해서 빌린 리어카의 반도 차지 않았다. 남은 자리엔 연년생인 우리 자매를 태웠다. 틀로 찍어낸 듯 똑같은 집들 중 하나에 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명패가 달려 있었다. 아버지는 글자를 배우는 아이처럼 거기 적힌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30년 상환 장기 대출을 받아 산 집. 30년이라면 얼마나 긴 시간일까. 다가오지 않을 영원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밀린 이자를 독촉하는 우편물이 수시로 우편함에 꽂혀 있곤 했다. 자신 명의의 집을 지키느라 부모님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그 집을 떠나는 날에야 알았다. 집을 지키지 못한 걸 부모님은 창피해했다. 이웃의 배웅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서둘러 골목을 떴다.

요즘 남편의 얼굴에서 얼핏설핏 오래전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이제는 떠돌지 않겠다는 결심이라도 하듯 이년여 세상을 떠돈 남편은 한국에 돌아와 집을 샀다. 이번에도 30년 장기 상환이란 말이 따라붙었다. 집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확고해서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집은 흔들리지 않는 곳이라야 한다.” 얼핏 그 말을 듣자면 지긋지긋하게 이사를 다닌 사람처럼 느껴지겠지만 지금 그의 고향집은 그가 초등학교 때 이사한 곳이다. 아무래도 1960년 도시화를 쫓아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들의 특성이 그에게도 있는 듯하다. 형제 중 그만 유일하게 서울에 살고 있다. 고단하다는 서울살이에 자신의 집을 지키며 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보여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 아버지처럼.

집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으며 매달 힘들게 이자를 붓고 있는 남편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의 집은 진작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집주인은 제가 아니라 은행이랍니다”라는 우스갯소리도 하지 않은 지 오래다. 아파트 상가의 부동산중개소 유리창에 매물을 알리는 종이들이 수없이 나붙었다. 차마 우리는 하우스푸어, 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요즘 들어 아버지 손에 이끌려 올라갔던 남산의 야경이 자꾸 떠오른다. 수많은 불빛들이 명멸하던, 그 속에서 우리 집 불빛을 찾던 그때가.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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