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취중 막말로 물의를 빚은 새누리당의 김재원 의원은 대변인으로 발탁된 뒤 “(나는) 박근혜 후보와 통화를 안 해도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자랑했다. 그만큼 그는 친박계 안에서도 박 후보의 의중을 가장 잘 읽는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보스의 속마음을 너무 잘 아는 것이 때로는 화근이 될 수 있다. 그는 박 후보의 과거사 인식 기자회견이 있기 전날 저녁 기자들과 만나 “박 후보가 정치를 하는 목적은 아버지 복권을 위해서”라며 박 후보의 처지를 예수를 부정한 베드로에 비유했다. 일종의 천기누설이었다. 그가 대변인 노릇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중도하차한 것은 기자들에게 막말을 한 탓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기누설죄가 더 큰 것 같다.
박근혜 후보는 김 의원의 말대로 베드로가 됐다. 엄밀히 말해 아버지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박정희 시대가) 헌법 가치를 훼손하고 정치발전을 지연시켰다”는 발언은 ‘아버지를 넘어서는’ 의미 있는 발언으로 높이 해석됐다. 그를 겁박해 무릎을 꿇린 제사장과 바리새인은 다름 아닌 ‘지지율’이었다.
박 후보를 베드로로 치환해 놓고 보면 사실 진정성 논란이란 것은 무의미해진다. 베드로가 목숨의 위험 앞에서 잠시 무릎을 꿇었다 해도 결코 예수를 배반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를 부인하고 두 달도 안 돼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수천명을 모아놓고 설교를 한다. 체포돼 끌려가는 예수를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간 것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행동 역시 단순히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지키려는 행동이었다는 신학적 해석도 있다.
박 후보가 아버지를 부인한 것 역시 본뜻은 아버지를 살리려는 데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부활과 재림 왕국 건설은 그의 오랜 비원이다. 이 꿈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는 일이다. 박 후보는 이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행로를 조금 변경한 것이다.
박 후보의 최측근인 이정현 최고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박 후보는 국면을 모면하려고 말을 아무렇게나 던지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 회견의 한마디 한줄은 그 마음과 진정성을 담은 것이다.” 그 말도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최고위원의 말대로 과거 박 후보의 숱한 발언들 역시 모두 진정성이 담긴 말들이었다. ‘오늘의 진정성’과 ‘어제의 진정성’ 사이의 간격은 아득하기만 한데 어떤 진정성이 진정한 진정성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신법이 구법을 대신 한다’는 법칙을 여기에 억지로 갖다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박 후보의 과거사 인식 기자회견을 접하면서 느낀 감정은 허탈감과 착잡함이었다. 이미 베드로임을 알면서 굳이 예수를 부인하는 발언을 쥐어짜서 듣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도 밀려왔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처럼 박 후보 역시 기자회견을 끝내고 돌아서며 “그래도 5·16과 유신은 구국의 혁명이야”라는 혼잣말을 하지는 않았을까.
박 후보에게 아버지 고 박정희 대통령과 5·16, 유신헌법은 종교이며 신앙이다. 사과를 요구하고 인식의 전환을 주문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래서 그가 처연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과오를 인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치 내가 그를 겁박한 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이 된 것과 같은 불편한 심정도 들었다. 다행히 그는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흥겹게 말춤을 추었다.
박 후보의 회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이라는 주문도, 법적·제도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요구도 지금의 선거 국면에서는 모두 부질없다. 그의 과거사 인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유권자들의 판단을 구하는 길만이 남아 있다. 괜한 분칠과 회칠은 오히려 본질을 훼손할 뿐이다.
요한복음서의 마지막 장을 보면 부활한 예수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떡과 생선으로 아침식사를 나눈 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거듭 묻는다. 베드로는 세 번 모두 “그렇다”고 답변한다. 분명한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부활하더라도 박근혜 후보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을 필요는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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