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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경북 봉화에 와 있다 / 유정아

등록 2012-09-28 19:17수정 2012-09-28 19:35

유정아 서울대 초빙 연구위원
유정아 서울대 초빙 연구위원
경북 봉화에 와 있다. 봉화에서의 첫번째 밤. 무척 오고 싶었으나 발 딛지 못했던 곳에 와 있다는 담담한 기쁨이 차오른다. 봉화 출신 건축가이신 류춘수 선생님의 초대를 받기도 했고 문인들의 방문길에 동행할 일도 있었는데, 이래저래 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한 지인이 봉화 옆 청량사와 청량산 경관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며 추천하는 걸 듣고는 꼭 한번 가리라 마음먹었던 차에 <한국방송>(KBS)의 ‘한국 재발견’에서 연락이 와 정겨운 선후배들과 ‘봉화 발견’ 길에 오른 것이다. 이런 절묘한 우연들이 인생을 맛있게 한다.

봉화와 안동 사이에 위치한 청량산은 예로부터 그 경관이 빼어나 조선시대 많은 선비들이 유람기를 남겼다. 주세붕(1495~1554)은 청량산 12봉을 특징에 따라 적절히 명명하였으며, ‘한강 북쪽에 살면서 일찍이 이 산을 한번 찾아 오르려고 했으나 길이 막혀 있고 지역이 멀어 한갓 누워서도 정신이 거기 가서 노닌 지가 반생이다. 지금 다행히 남쪽으로 와서 이 산을 오르게 되었으니 평생의 소원을 푼 셈’이라고 쓴 조선 후기의 학자 오두인(1624~1689)의 글도 있다.

나는 예전부터 길을 나서면, 내가 가는 방향이 동서남북 어디인지, 전체 지역에서 어디 정도를 가고 있는 건지 알아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거리와 방향에 대해 대충 감이 있었다. 낯선 곳에 와서도 막연하나마 방향을 잡으면 가고자 하는 방향이었다. 남들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전혀 그런 게 궁금하지도 않으며 화장실을 나와서도 왔던 방향으로 다시 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방향치에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따르거나 죽자고 나름의 이정표를 기억하는 방도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참, 저러고 어떻게 사냐.’ 마치 그들이 잘 못 찾는 길이 삶의 길이기라도 한 양, 내가 혀를 차며 속으로 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런다. 다 알던 길을 나서면서도 운전대를 쥐고 ‘어떻게 가야 하더라’ 막막할 때가 많고, ‘분명히 이 방향이 맞을 거야’ 하고 방향을 틀었을 때 전혀 정반대의 길로 나오게 되는 무시무시한 경험. 그래서 내비게이션을 켜놓고도 교차로나 출구를 놓칠세라 전전긍긍하며 예전 내심 무시하던 이들처럼 길과 방향에 대해 대단히 겸손하게 행동하고 있는 나를 본다. 난 얼마든지 틀릴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올바르지 않은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심지어 역행할 수 있는. 난 그래도 여전히 내 육신의 이동방향에 관심이 있다.

전교생 33명인 서벽초등학교의 가을운동회가 끝나기 전 촬영을 해야 해서 오전 강의를 마친 후 방송국 차를 타고 거의 날 듯이 봉화에 도착했다. 나는 조선의 학자와 달리 잘 닦인 길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봉화에 이르렀다. 미리 와 있던 촬영팀이 끝나가는 운동회를 이래저래 구실을 대 연장시키느라 애쓴 흔적을 들으니, 예전 홍대 앞에서 양화대교 가는 방향에 있는 한 건물에서 봤던 거짓말 같은 업소 선전 문구가 떠올랐다.

‘비행술과 축지법 가르쳐 드립니다.’ 비행기나 고속철 같은 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탈것에 오르는 방법 외에 이 시대에 초라한 건물 2층에서 전수받을 수 있는 축지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내일 오후엔 청량산에 오를 계획이다. 축지법 같은 것은 없다. 다만 한 발자국씩 부지런히 내디디면서 목적지에 이를 뿐이다. 우리가 불온했던 과거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착실하게 차곡차곡 정신차리고. 그것이 어쩜 그 업소에서 가르치고 있던 축지법이 아니었을까. 내일 청량산에 오르기 전 이른 새벽엔, 제일 먼저 물안개 피어오르는 합강에 갈 것이다.

유정아 서울대 초빙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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