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칠흑같이 어두운 밤. 철책선 너머를 응시하는 초병의 눈은 초롱초롱하다. 미세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적의 침투 징후가 발견되면 ‘누르고(크레모아), 던지고(수류탄), 쏘라(소총)’는 행동수칙을 되새기며 경계 자세를 가다듬는다.
전방 철책선 경계초소의 ‘이상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고참은 이미 소총을 베개 삼아 꿈나라를 헤매고 있다. 초소를 홀로 지키는 졸병 역시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철조망 너머 북의 동태가 아니다. 순찰 나오는 소대장의 군화 발걸음 소리, 중대장의 오토바이 엔진 소리, 대대장 지프 불빛 등이 경계 대상 1호다. 이름하여 ‘후방 경계’다.
군의 기강해이 실태를 만천하에 드러낸 ‘노크 귀순’ 사건을 접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풍경이다. 그러나 ‘후방 경계’가 어디 말단 병사들만의 일인가. 전방 경계보다 후방의 동태에 관심을 쏟는 것으로 말하자면 군 수뇌부가 더하다. ‘사상전의 승리자’가 되자며 종북 교육으로 법석을 떤 것도 따지고 보면 전형적인 ‘후방 경계’다. 할 수만 있으면 ‘후방 수색·소탕 작전’까지 벌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군은 ‘사상전의 승리자’가 되기 전에 ‘야간경계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다.
예전 군 복무 시절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키느라 고생하는데 민주화니 뭐니 하며 데모나 하는 놈들은 뭐야. 모두 총살시켜 버려야 해” 따위의 말을 하며 입에 거품을 무는 군인들을 간혹 본 적이 있다. 이렇게 핏대를 올리는 군인치고 정작 자기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우리 군 수뇌부의 모습이 바로 그 짝이다.
군의 ‘자기 위치 망각증’은 이미 천안함 사건 처리 과정에서부터 나타났다. 북한에 그렇게 철저히 당한 게 사실이라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는 것이 정상인데도 마치 큰 전공이나 세운 것처럼 행동했다. 여기서 그쳤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천안함 사건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믿지 않으면 무조건 종북주의자로 몰았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군은 종북 정도가 아니라 패북(敗北), 항북(降北) 세력이 돼버렸다.
이명박 정부 들어 과거의 못된 모습으로 되돌아간 기관은 검찰을 비롯해 많지만 군도 빼놓을 수 없다. 오랜 정치지향성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아가는가 싶더니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유신 반대도 종북” 따위의 터무니없는 정신교육을 들고나온 것도 대선 국면에서 정치적 디엔에이가 작동한 결과다. 그뿐인가. 기무사 민간인 사찰 논란, 불온서적 리스트, 정부에 비판적인 앱·사이트 삭제 지시 등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존재 이유인 북한군과의 대결에서는 번번이 창피를 당하고 있다.
국방부가 ‘노크 귀순’ 사건과 관련해 대대장 이상 상급자들만 문책하기로 한 것도 정치적 계산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것이 진정으로 위관급 이하 초급간부와 병사들을 위한 순수한 의도라면 백번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내심은 딴 데 있다. 대선을 앞두고 이들을 처벌할 경우 젊은층 유권자들을 자극해 여권에 불리할 것이라는 정치적 주판알을 튕긴 것이다. ‘밑의 잘못’이 없다면서 ‘위의 지휘책임’을 묻는 것부터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그러려면 차라리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이 “우리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벌을 받겠다. 다른 부하들은 모두 용서해달라”고 용기 있게 나서야 옳다.
‘안보와 민생’은 보수정권이 자기네 전유물처럼 입에 달고 사는 의제다. 심지어 야당을 ‘안보·민생 저해세력’으로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나타난 현실은 정반대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민생의 문제점은 새누리당 스스로 인정할 정도다. 국민이 지금처럼 군을 못 믿고 안보를 걱정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새누리당은 또다시 안보와 민생 문제로 큰소리를 친다. 당장 철책에 구멍이 뚫리는 것은 본 척 만 척 하면서 실재하지도 않는 비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북방한계선(엔엘엘) 발언 타령으로 날을 지새운다. 바다의 엔엘엘과 달리 육지의 확실한 영토선인 철책 하나 제대로 못 지키면서 안보니 영토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는 그 배짱이 놀랍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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