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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기자와 시인 / 김흥숙

등록 2012-10-19 18:59

김흥숙 시인
김흥숙 시인
책은 한 달에 한 권 읽을까 말까 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지만 노벨문학상에 관한 관심만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습니다. 해마다 고은 시인을 괴롭히던 기자들이 올해는 좀 지쳤는지, 작년보다는 수상자 발표 전의 말장난이 줄어든 듯했습니다.

상은 제 갈 길을 가다 우연히 줍게 되는 ‘은단추’ 같은 것이지만, 이 나라에선 어느새 상이 목표가 되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좋은 시는 상을 타지 않고도 가슴속으로 들어옵니다.

고은 시인의 시 중에 ‘예감’(豫感)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원제목은 한자로 되어 있습니다. “가을이다. 어느 나라의 인구(人口)가 줄어든다”로 시작하는 이 시의 첫째 연에는 “들쥐들이 종점(終點)에서 종점으로 몰려다닌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도 기자 출신이지만, 기자들은 언제부턴가 ‘들쥐들’처럼 몰려다닙니다. 쓸 가치가 없는 기사도 남이 쓰면 쓰고, 크게 쓸 필요가 없는 기사도 남들 따라 키우는 일이 허다합니다.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최근 발언 같은 것은 크게 쓸 필요가 없는 것이었지만 기자들은 모두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비밀 단독회담을 갖고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하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대통령 후보의 소통 불능, 보수인사들의 회귀 등으로 내분에 휩싸였던 새누리당은 북풍을 반기며 국정조사를 하자고 외쳤습니다. 지지율 하락으로 고민하던 박근혜 후보는 ‘제일 잘 아는 사람이 관계된 사람 아니겠느냐’며 ‘노무현의 그림자’였던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를 겨냥했습니다.

그러나 외교의 기본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 일은 좀 황당합니다. 정치부 시절 외무부를 출입했던 저도 정상회담은 단독회담과 확대회담 두 형태로 이루어지며, 단독회담이라 해도 말만 ‘단독’일 뿐 정상 단둘이 만나는 게 아니고 양쪽에서 몇 사람이 배석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당시 남북정상선언 합의문을 작성했던 배기찬 전 청와대 동북아비서관도 기자회견을 열어, 단독정상회담엔 남쪽에서 4명, 북쪽에서 김양건 통일선전부장이 배석했다며, 정 의원이 비밀회담 자료로 제시한 문건은 바로 자신이 만든 문건이라고 밝혔습니다.

정 의원이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불러낸 게 8일, 국방부가 ‘종북세력은 국군의 적’이라고 규정하는 ‘종북 실체 표준교안’을 전군에 보내 신병훈련소와 야전부대 등에서 교재로 활용하라고 한 게 10일입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어제는 외교통상부 산하 한국국제교류재단이 한국 홍보지 <코리아나>의 100호를 기념하는 출판문화 세미나를 열었는데, 정 의원이 이 세미나의 공동 주최자라고 하니 ‘그이가 왜?’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써야 하는 글, 쓰고 싶은 글을 쓸 자유와 쓸 필요가 없는 글,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쓰지 않을 자유를 뜻합니다. 그러나 고유의 잣대를 잃은 채 ‘왜?’를 묻지 않고 몰려다니는 기자가 적지 않습니다. ‘왜’를 묻지 않는 기사는 함석헌 선생이 말씀하신 격화소양, 즉 ‘신 신고 발바닥 긁는 것’과 같은 글이 되기 쉽습니다.

시인, 기자, 쓰는 방식은 달라도 무릇 쓰는 자의 일은 오직 한 가지, 역사를 적는 것입니다. 오늘 그들이 기록한 것이 훗날 역사가 됩니다. 시 ‘예감’은 이렇게 끝납니다. “일생(一生)의 호각소리가 뚝 그친다./ 모든 무덤들은 말한다./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고/ 머무는 친우(親友)여 나는 혼자서 뻗은 길을 걸어가야겠구나.”

상을 좇지 말고, 권력에 겁먹지 말고, 가끔 무덤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며 ‘혼자서 걸어’가는 기자가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김흥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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