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언론인
“유신 선포로 한반도는 독재 체제의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다. 북의 김일성, 남의 박정희 독재자가 무한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삼천리강산에는 남북 가릴 것 없이 짓밟힌 민중들의 피눈물이 넘쳐흘렀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38돌을 맞아 동아투위(자유언론을 부르짖다 1975년 봄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언론인 단체)가 발표한 성명서의 한 구절이다.
유신 선포 후 40년이 흘렀다. ‘독재 체제의 남북조 시대’에서 이제는 ‘지배권력 세습의 남북조 시대’로 가는 듯하다. 북에는 3대 세습 체제가 들어섰고, 남에는 ‘유신공주’ 박근혜 후보가 지금 각종 여론조사에서 다음 대통령 자리에 가장 가까이 가 있다.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국민의 선택에 의한 것이니 ‘세습’은 가당치도 않다고 하겠지만, 박정희의 딸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박근혜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북의 3대 세습과 맞물리며 남북이 조롱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 시대의 퇴행성은 ‘아버지 박정희’와 과거사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이지러진 인식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혁당 사건뿐 아니라 최근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그의 궤변과 무지를 보면 여전히 ‘과거의 벽’에 갇혀 있음이 분명하다.
주변 ‘친박들’ 얼굴도 부패·비리·냉전·수구의 전사들로, 21세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다. 검찰 조사에서 3000만원 받았다고 고백한 홍사덕 전 의원은 ‘친박 좌장’이었고,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 만드는 데 필요하다”며 서울 강남의 한 사업가에게 노골적으로 금품을 요구한 송영선 전 의원은 친박의 돌격대였다. 연일 색깔론의 옛 레코드를 틀고 있는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 안철수 불출마를 종용하는 ‘협박 전화’를 했다는 정준길 전 공보위원(최근 새누리당 서울시당 선대위의 ‘깨끗한 선거추진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친박 인사들의 백태다. 오죽했으면 친박계인 유승민 의원이 한때 “박근혜 주변은 부패하고 낡은 인물들로 채워졌다는 말을 듣는다”, “후보만 빼고… 모든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고 했겠는가.
여기에 당적(무소속 포함)을 무려 13번이나 바꾼 이유를 “지구를 한 바퀴 반 돌다 보니 그리됐다”며 국민들의 염장을 지른 이인제 의원의 선진통일당과 합당하면서 그것도 ‘국민통합’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근혜 체제는 이명박 시대의 연장이 될 게 뻔하다. 지지 기반과 이념적 성향이 같을뿐더러, 재벌·관료·수구언론·공안세력 등 수구 카르텔의 동지적 세력이다. 그러기에 내곡동 사건을 무혐의 처리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배임의 여지가 있었지만 이익을 본 대상이 대통령 일가 등이 되기 때문에 부담이 있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최교일 서울중앙지검장 같은 정치 검찰은 그대로 온존할 게 뻔하다. 문화방송 김재철 사장 부류의 건재가 보여주듯 정권친위대에 장악된 방송이 달라질 턱이 없다.
이처럼 지배권력만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수구 카르텔의 지배구조도 그대로 세습된다. 새로운 미래는 애초부터 잉태될 수 없다. 과거를 지키자는 ‘수구’가 본태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수구 카르텔은 매우 강고하다. 맞서 싸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야권이 단순한 물리적 결합을 넘어 희망, 미래, 가치, 정책을 공유하는 화학적 결합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야권 단일화 과정이 뺄셈의 제로섬 경쟁이 아니라, 기반과 외연을 확대하는, 감동과 신명나는 정치의 과정이 되어야겠다. 특히 단일화의 틀과 룰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런 감동과 신명이 나와야지, 정치공학으로만 접근하면 환멸만 남기게 된다.
답은 뜻밖에도 간단하다. 마음을 비우면 된다. 겨레와 민족,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헤아리면서 박근혜의 ‘세습’을 막기 위해 무얼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질 터이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사람이 결국 국민의 마음을 얻고, 이기게 된다. 대권이 오가는 피투성이 정치판에서 그 무슨 몽상가 같은 얘기냐고 타박할지 모르겠으나, 이 나이 되어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삶의 진리다.
정연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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