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시인
부음은 떠나는 이가 보내는 마지막 편지이니 놓치지 말아야지 하지만 가끔 아주 소중한 편지를 놓칠 때가 있습니다. 사모님 가신 것도 발인 후에야 알았으니 저의 부덕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모릅니다. 2003년 가을 선생님 떠나시고 아홉 해가 흘렀으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뒤늦게 그간의 격조를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처음 307호에 여장을 풀던 날, 사모님이 수줍게 미소 지으시며 저희를 찾아오셨지요. “필요할 것 같아서요.” 꼭 저희 아이 손바닥만 한 종이에는 가스집, 쌀집, 중국집, 슈퍼, 열쇠집…. 막 이사 온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가게들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뿐인 아이는 일하는 엄마를 둔 초등학생답게 외로웠습니다. 사모님은 말씀을 아끼셨겠지만 언제나 오월 햇살 같은 미소로 아이를 위로해주시고, 엄마가 집을 비운 동안 아이가 무신경한 어른들로부터 상처받는 일이 없게 마음을 쓰셨습니다.
엊그제, 사모님 가신 얘기를 듣던 자리에 이제 서른 넘은 아이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이 금세 붉어지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며칠 후에야 사모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주셨는지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모님은 이 세상에 단 한 분뿐인,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따스하고 기품 있는 귀부인’이셨다며 다시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그 동네에서 308호처럼 손님이 많이 오는 집은 없었을 겁니다. 맑은 정신으로 찾아오는 사람보다 이미 노을진 얼굴로 오는 사람이 많았고, 한 번 온 손님이 금세 가는 적도 없었습니다. 처음엔 모두들 선생님을 뵈러 오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근삼 선생님은 유명한 극작가이며 존경받는 교수님이었으니까요.
어느 해 섣달그믐 밤, 제법 취하신 선생님이 마당에서 제 남편과 조우하신 후 저희 집 문을 두드리신 일, 기억하세요? 한밤중인데도 선생님은 저희 부부를 한사코 댁으로 끌고 들어가셨지요. 사모님은 먼 곳에서 온 귀한 손님을 맞듯 반갑게 맞아주시며 향기로운 술과 다양한 안주를 내놓으셨지요.
10여년간 저희에게 온기를 나눠주시다 이사 가시던 날은 정말이지 가슴속까지 추웠습니다. 선생님의 책들을 재활용품 창고에서 보고 속상해하는 제게 “너무 오래된 책들이라 기부가 안 된대요” 하시며 담담히 위로하시던 모습이 삼삼합니다. 사모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선생님 궤연 앞, 신문 부음란을 보고 달려간 저를 여전한 미소로 반겨주셨지요.
1994년 선생님의 정년퇴임을 기념해서 제자들이 펴낸 책 <무대와 교실>을 보면 연극인이며 기업가인 김동욱씨도 저만큼이나 사모님의 미소에 감동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유일한 술주정은 과음 끝에 토하는 일이다… 나는 비교적 양이 크기 때문에 토하는 양도 많다. 선생님 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모님은 큰 대야를 가지고 오셔서 오물을 수습하신다. 이럴 때도 사모님은 싫은 소리는커녕 그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으신다. 나의 주변에서 이런 분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사모님의 미소는 어떤 지식이나 가르침보다도 나의 마음을 순화시켰다.”
307호를 떠나온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옆집이 공사를 하여 시끄러울 때, 윗집의 아이들이 우당탕탕 뛰어다닐 때면, 사모님이 생각납니다. 사모님은 찾아가 불평하는 대신 ‘옆집이 공사를 하니 더 좋아지겠구나’, ‘아이들이 건강하여 뛰놀 수 있으니 다행이구나’ 하고 또 아름답게 미소 지으시겠지요. 그러고 보니, 저희가 옆집, 윗집과 잘 지내는 것도 다 사모님 덕택입니다.
사모님, 홍인숙 여사님, 감사합니다. 다시 뵈올 때까지, 그 미소, 그 사랑, 흉내 내며 살겠습니다.
김흥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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