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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싱크탱크 시각] 진보개혁의 성찰과 길: 일상의 정치 / 이창곤

등록 2012-12-26 19:16수정 2013-05-16 16:27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나는 이제 이 땅에 숨쉬는 인간은 그가 아는 이든 모르는 이든 5년간 외면할 것이다.” 대선 직후인 지난 21일 한 지인한테서 받은 문자메시지다. 그는 올해로 오십 줄에 접어든 한 집안의 가장이다. 한때는 군사독재에 저항한 열혈 청년이었고, 근년에는 한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업체를 운영하다 그 대기업과 손해배상을 놓고 일전을 치른, 인생의 단맛은커녕 쓴맛만 잔뜩 본 자영업자였다. 그는 자칭 ‘5년간 칩거생활 선언문’을 문자로 날린 뒤 칩거에 들어갔다. “동생 죽고 난 뒤 처음으로 통곡했다”, “어찌 사나요, 원통해서…” 등 연말 모임과 카카오톡 등에서는 대선 후유증을 앓는 이들의 토로가 여전히 줄을 잇는다. 개중에는 숫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비현실적인가”, “앞으로 투표를 하지 않겠다”며 정치혐오증을 내비치는 이들도 적잖다.

정권교체의 열망이 뜨거웠던 만큼 상실감은 이해할 만하나, 그렇다고 그것이 정치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져선 곤란하다. 민주주의는 본디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을 전제로 할 때 성립되는 체제다. 그래도 좌절감의 한쪽에서 승복과 성찰을 말하고 새로운 시작을 강조하는 이들도 적잖은 것을 보면, 비록 미완이라고 해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물론 진보개혁세력에게도 희망의 근거는 충분히 있다고 하겠다. 선거 직후 한 지인은 “보수는 총결집했고, 진보는 연대의 수준에 머물러 국민들에게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어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지 못한 게 큰 원인인 것 같다”고 진단했다. 진보개혁세력은 왜 믿음을 얻지 못했을까? 진보개혁세력이 되짚어야 할 점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일 것이다.

대선 직전, 마침 누이들과 함께 중소도시에서 어머니 생신 모임을 가졌다. “가난한 이들은 복지를 잘할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며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해 설명하는 나에게, 한 누이는 “정치가 밥 먹여 주었나, (진보가) 정권을 잡아도 다를 게 없던데”라고 반문했다. 작은 의상실을 하는 50대 중반의 큰누이, 실직한 매형을 대신해 대형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힘겹게 가정을 꾸려가는 둘째 누이, 대기업 기술자로 있다가 구조조정으로 인해 지금은 영세업체에서 기름밥 먹는 남편을 둔 셋째 누이, 24시간 편의점을 운영하느라 매제와 함께 거의 하루를 저당잡혀 사는 막내 누이, 고단하고 바쁜 삶을 이어가는 누이들에게 진보개혁의 정치와 정책은 어떤 응답을 해왔나?

누이들은 지금껏 진보개혁의 정책과 담론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고, 대선 과정에서는 그것을 보수의 것과 구분하지 못했으며, 진보의 정치와 보수의 정치를 자신의 삶의 변화와 연관시켜 이해하지 못했다. 진보개혁세력은 좀체 대면하기 어려운 먼 존재인 반면, 그들의 곁에는 일상적으로 보수의 정책과 정치를 대변하는 수많은 ‘입’과 ‘조직’이 있었다. 보수의 담론과 의제는 학교에서, 시장에서, 경로당에서, 교회에서 전파돼 누이들에겐 상식과 대중의 언어가 된 반면, 진보의 담론과 의제는 몇몇 신문과 시민단체의 강좌에서나 볼 수 있는 배운 이나 먹고살 만한 이들의 언어에 머물렀다. 진보개혁세력은 패인을 놓고 50대의 보수성을 논하기에 앞서, 일상의 시공간에서 안정감을 주고 믿음을 얻고자 했던가, 그런 정치를 했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일상에 있는 시민의 그릇된 상식과 보수의 언어를 전복하지 않고서는, 무엇보다 이를 가능케 하는 아래로부터의 입과 조직, 곧 일상의 정치를 통한 믿음을 얻지 않고서는 진보개혁세력의 집권은 멀며 집권을 했다고 해도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18대 대선의 결과에서 곱씹어야 할 교훈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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