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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2012년 성탄절 단상 / 호인수

등록 2012-12-28 19:06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어김없이 그때가 떠오른다. 20년 전, 내가 김포성당에 있을 때다. 성탄절에 우리는 색색 깜빡이로 치장한 예쁜 마구간 대신 성당 마당에 2평쯤 되는 간이판잣집을 지었다. 볏짚으로 지붕을 엮어 얹고 안에는 갖가지 농기구와 잡동사니들을 늘어놓았다. 예수님이 김포 같은 농촌에서 태어나신다면 아마 이런 헛간이겠다 싶어서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어떻게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최근에 태어난 사내아이를 수배했는데 마침 우리 신자 중에 태어난 지 사흘 된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미역을 사 들고 산모를 찾아가서 부탁했다. 성탄날 밤에 잠시만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가 되어주시지 않겠냐고. 영광이라며 젊은 부모는 쾌히 승낙했다.

12월24일 밤, 마당 간이헛간 앞에 모여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노래하면서 예식을 시작할 때까지도 교우들은 30촉 전구가 희미한 안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아기가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을까?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맨 앞에 있던 초등학교 아이들이 깜짝 놀라 들여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 진짜 사람이네. 엄마, 저기 사람이 있어요.” 뒤쪽에 있던 신자들이 그제야 우르르 몰려들어 저마다 목을 뺐다. 그랬다. 거기에는 매년 보던 인형이 아니라 포대기에 싸인 아기와 자랑스러운 엄마가 누워 있었다. 사람이 태어난 것이다.

성탄절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 가건물이 아까워 마당 한 모퉁이에 두고 쓰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헛간 정면이 거적으로 가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해서 거적을 들쳐보다가 기겁을 했다. 웬 사람이 헌 이불을 두르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자 얼굴이 낯익었다. 매일 하릴없이 동네를 배회하는, 동네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노숙자 아무개였다.(지금은 이름을 잊었는데 가족이 어딘가에 산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라는 사람도 있었다.) 구석에는 석유풍로와 냄비랑 양재기들이 뒹굴고 있었다. 그는 내게 거기 있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안 될 일이다. 엄동설한에 사람을 헛간에 살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게다가 불이라도 나면 잿더미가 된다.

나는 바로 음성 꽃동네에 전화로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를 차에 태워 보냈다. 내심 뿌듯하고 흐뭇했다. 그런데 그가 우리 헛간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화가 났다. “꽃동네에 가면 배부르게 먹여주고 등 따습게 재워주는데 왜 나왔어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요.”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를 억지로 다시 꽃동네로 보냈지만 며칠 안 돼서 그는 또 돌아왔다. 이제는 할 수 없다. 강수를 썼다. 널려 있는 것들을 주섬주섬 보자기에 싸서 밖에 내놓고 여기서 나가라고 고함을 쳤다. 어디를 가더라도 이 겨울에 헛간 생활은 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어깨가 축 처져 떠나던 그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가 가까운 농수로에서 언 시체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며칠도 안 돼서였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쏟아져 참을 수가 없었다. 성당에 들어가 통곡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곳에 살겠다는 사람을 나는 잘한답시고 내쫓아 결국 얼어 죽게 한 것이다.

지난 19일, 우리는 유신시대의 제2인자로 평생을 부자의 편에서 살아온 후보를 선택했다.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의 이름으로. 그로부터 불과 이삼일 후, 쌍용차의 스물세 분도 모자라 한진과 현대에서 연이어 두 분의 노동자가 또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우리는 그분들의 절망을 끌어안지 못한 채, 철탑 위의 세 분을 혹한 속에 버려둔 채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누구를 위한 환호성인가?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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