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많은 사람이 전화기 옆을 떠나지 못하는 계절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한테서 걸려올지 모를 한 통의 전화 때문이다. 이달이 가기 전에 총리 지명을 마친다고 하니 벌써부터 학처럼 목을 빼고 전화기 옆을 서성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특히 호남 총리론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쪽 출신 인사들의 가슴은 더욱 설레는 듯하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박준영 전남지사는 엊그제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지난 대선에서 이 지역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에게 몰표가 나온 것을 “무겁지 못했고 충동적인 선택이었다”고 꾸짖었다. 일종의 육성 전향확인서요, 자신을 총리로 간택해달라는 노골적인 추파다. 총리 자리만 얻을 수 있다면 고향 사람들의 아픈 상처에 다시 소금을 뿌리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박 지사는 대선에서 누구를 찍었을까. 그 자신은 ‘충동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민주당 소속이면서도 새누리당 후보를 찍었을까. 참으로 모를 일이다.
호남 출신 국무총리 한 명 기용한다고 해서 국민 통합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 우리 정치사가 실증한다. 당사자야 일신과 가문의 영광이겠지만 대다수 호남 민초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또다시 호남 총리론과 함께 대통합과 대탕평책 타령이 들려온다. 지금 전망대로 호남 출신 총리가 기용되면 언론에서는 “당선인의 강력한 국민통합 의지” 따위의 해설기사로 도배를 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집단적 사기극이다.
더욱 역겨운 것은 총리 지명을 권력이 내리는 시혜나 은총처럼 여기는 풍토다. 그것은 본인뿐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이 함께 감읍해야 할 대상처럼 돼 있다. 하마평에 오른 사람들도 대부분 ‘불러만 주시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있다. 아무리 추워도 권력의 곁불을 쬐지 않겠다는 오연한 기상을 기대하는 것은 난망하다. 개인적으로 그쪽이 고향이지만 이런 이유로도 호남 총리론이 싫다.
총리의 권한이 막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대통령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일이다. 대통령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발을 잘못 내디뎠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게 그 자리다. 게다가 박근혜 당선인의 스타일은 위임통치와는 거리가 멀다. 평소에도 2인자를 용인하지 않은 게 박 당선인이다. 강력한 친정체제 구축의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감지된다. 책임총리제 이야기도 나오지만 권한은 없이 말 그대로 책임만 큰 총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 정부의 첫 총리가 굳이 호남 사람이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출신 지역이 아니다. 정말로 박 당선인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고 생각의 방향이 다르면서도 국정을 함께 헤쳐나갈 사람이면 지역이 무슨 대수인가. 그럴 생각이 없으면서 괜히 호남 출신 총리로 생색을 내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어차피 통큰 인사, 감동적인 인사가 어렵다면 ‘최악’이나 피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다. 대선 이후 이뤄진 박 당선인의 인사 내용을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최악의 선택’이 종종 있었다.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 김경재 국민통합위 부위원장 등 막말 인사들의 중용은 단적인 예다. 대선 때 자신을 도와준 은공을 갚는 것이야 좋다. 하지만 꼭 피해야 할 자리에 콕 집어서 앉히는 심사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면서도 그것이 통합과 소통의 지름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박 당선인의 기묘한 현실인식, 그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역시 최악의 선택임은 다시 첨언할 필요가 없다. 보수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의 인물을 족집게처럼 발탁하는 능력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그래 놓고 ‘헌재소장은 티케이 시켰으니 총리는 호남 몫’ 따위의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이 공직들이 무슨 저잣거리 물건처럼 고향 따라 하나씩 주고받아도 되는 자리인가.
지금 중요한 것은 지역 안배가 아니다. 선심성 공직 배분, 일방통행식 화해의 손짓이 탕평의 본령도 아니다. 진정으로 이 나라의 통합과 화해를 염원하고 있다면 잘못된 인사부터 거둬들이는 것이 순서다. 이런 인식의 변화가 없는 한 호남 총리를 10명을 시켜도 부질없는 일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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