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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새로 온 보좌신부 / 호인수

등록 2013-01-18 19:14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지난 한달 가까이 나는 실망과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대선 다음 주일 미사에는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을 낭독했다가 신자 세 분에게 뜻밖의 봉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선거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더 이상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내친김에 앞으로 평일 미사에는 아예 강론을 하지 않겠다고 말해버렸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성숙한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특히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눈이 맑은, 우리 나이로 서른셋의 잘생긴 청년입니다. 지난 2년간 인천의 다른 성당에서 보좌로 일하다가 사제가 된 지 3년차에 인사발령을 받고 승합차에 책이며 이불 보따리 달랑 몇 개 싣고 우리 성당에 온 김상우 신부입니다.(보좌신부는 의사면허를 받고 전문의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인턴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특별히 눈에 띈 것은 두 개의 기타 케이스였습니다. 차에서 내리는 얼굴엔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생면부지인데 주임과 보좌로 만나 함께 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요. 아랫사람으로서는 긴장될 수밖에요.

가끔 천주교회의 인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이참에 말씀드립니다. 천주교회 사제의 인사 이동은 전적으로 교구장 주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근무 연한은 정해져 있지만 그것도 교구장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습니다. 극히 제한된 특수보직을 제외하면 사회에서 교사나 공무원의 인사에 적용되는 제1, 제2지망 같은 것도 사제들에게는 없습니다. 매년 인사철이 되면 온통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공문을 받기 전에는 추측조차 불가능합니다.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스타일과 닮았습니다.

새로 오는 보좌신부를 환영하러 나온 교우 할머니들과 부인들이 저마다 쑥덕쑥덕 귓속말을 했습니다. “아휴, 키도 크고 잘생겼어. 그렇지?” 내 귀에도 들렸습니다. 공연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얼굴을 돌려 그분들에게 눈을 맞추고 찡긋찡긋 웃어드렸습니다. 예전에는 젊은 신부가 잘생겼다는 말에는 꼭 아깝다고 한마디 더 하더니 요즘엔 그런 말은 잘 안 들립니다. 사방에 젊고 잘생긴 청년들이 차고 넘쳐서 그럴까요? 나와 함께 살다가 후임 신부가 도착하기 조금 전에 떠난 30대 후반의 전임 보좌신부도 빠지지 않는 미남이었거든요.

이튿날, 함께 점심을 먹는데 보좌신부는 여전히 자세나 말투가 편치 않아 보였습니다. 어제의 긴장이 풀리지 않았던 게지요.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과 겸손을 보았습니다. 그래섭니다. 나는 그에게 엉뚱한 주문을 했습니다. “신부님이 앞으로 성당의 남자화장실 청소를 맡아서 해볼래요?” 혹시 그의 눈빛이 달라지지 않을까 했던 나의 예상은 바로 빗나갔습니다. “예, 제가 하겠습니다.” 나도 참 별난 인간입니다.

그의 기타가 진가를 발휘한 것은 그날 저녁 미사 때였습니다. 그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늘 엄마 생각을 하면서 사제가 되는 형에게 바치는 선물로 자신이 작사·작곡했다며 기타를 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애잔한 그의 노래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철철 넘쳐흘렀습니다. 몇몇 할머니들과 부인들은 눈물을 찍어냈습니다. 노래하는 보좌신부가 내게는 하나도 청승맞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점심 먹으면서 음악 공부를 더 하고 싶다던 그의 말을 백 퍼센트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이제 30년도 더 차이가 나는 새 보좌신부와 한솥밥 먹고 한 지붕 밑에서 자야 합니다. 쉽지만은 않겠지만 예감이 좋습니다. 어떻습니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됐나요?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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