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모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술잔이 오가고 노래를 부르는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배시시 웃었다. 누구신지? 한눈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반백에 주름진 얼굴, 몇 학번 위의 선배인 듯싶어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가 다시 소리 없이 웃었다. “와, 이제 시간문제다!” 박수를 치며 환호하던 우리를 조용히 둘러보던 한 사람의 얼굴이 앞에 선 중년 남자의 얼굴과 겹쳐졌다. “어? 어!” 너무 반가우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책이 나온 것이 1994년이었으니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그해였을 것이다. 그가 탁자 위에 슬그머니 밀어놓은 ‘삐삐약어집’이란 책을 돌려보면서 우리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다 할 수 있을까. 그의 성공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삐삐’라고 하면 ‘말괄량이 삐삐’를 떠올릴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1990년 중반 우리의 주머니나 허리춤엔 ‘삐삐’라 불리던 무선호출기가 있었다. 누군가의 소식을 기다리다 주머니 속의 삐삐가 진동할 때의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말하지 않아도 다 공유하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 앞에는 삐삐에 찍힌 번호를 확인하는 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전화를 하지 않고 전달 내용을 알 방법은 없을까,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면서 수없이 했던 생각이다.
그때도 이미 간단한 삐삐약어는 통용되고 있었다. 7676은 착륙착륙, 8282는 빨리빨리. 이렇듯 음차를 한 간단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삐삐약어는 열 자릿수 이상으로 늘어나 제법 긴 사연까지 담아내게 되었다.
‘삐삐약어집’은 바로 그 삐삐약어들을 정리한 책이었다. 수첩 크기로 휴대가 편해 그때그때 단말기에 뜬 숫자들이 무슨 뜻인지 확인할 수 있고 보낼 수도 있었다. 밀리언셀러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와, 이제 시간문제다!” 우리는 그에게 다가온 행운이 마치 우리 일이라도 되는 듯 즐거워했다.
아무도 그 ‘시간’이 ‘문제’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당시에도 휴대폰은 있었다. 들고 있기에 부담스러우리만치 큰 휴대폰도 어느 정도 작아졌지만 문제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었다. 통화 중간중간 자꾸 끊기는 통화 품질도 문제였다. 우리는 삐삐가 영원하리라 믿었다. 책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휴대폰이 급속도로 보급되리란 걸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 뒤로 시간이 흘렀다. 그와는 진작에 소식이 끊겼다. 간혹 이야기 속에 그의 이름이 회자되곤 했다. 삐삐를 쓰던 시절과 삐삐에 얽힌 에피소드로 이어진 이야기는 그의 불운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휴대폰을 새것으로 교환할 때마다 그가 떠올랐다. 찍어놓고 팔리지 않아 어디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책들이 떠올랐다.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 속에 실린 숫자들과 그 숫자들을 풀어놓은 우리들의 비밀 언어들이 궁금해졌다. 휴대폰이 고장 난 이틀 동안 연락이 되지 않는 큰애의 안부를 걱정하다가 스치듯 그가 떠올랐다. 휴대폰이 스마트폰으로 진화되었을 때도 ‘세월 좋다’는 말 대신 그가 떠올랐다.
어수선함 속에서 우리는 잠깐 그렇게 서 있었다. 그가 내게 명함을 건넸다. 책과는 관련 없는 새로운 직장이었다. 말없이 서 있는 동안 나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준 것과 우리에게서 가져간 것에 대해 생각했다. 더 이상 우리에게 그런 행운의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책 속에 실린 숫자들 하나를 아직 잊지 않고 있다. 552111152(55211=VVELL, 1152=LIVE). 잘 살아라, 로마숫자와 알파벳 모양에서 연상해 만들었다는 숫자들. 그에게 이렇게 인사하고 싶었지만 못했다. 우리는 웃기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십팔년여 만에 인사를 나눴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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