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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정월대보름에 비나이다 / 호인수

등록 2013-02-22 19:13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정월대보름입니다. 내가 사는 곳은 대도시 변두리라 낡은 아파트며 연립주택들에 둘러싸여 멀고 가까운 산이나 들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힘겹게 떠오르는 달을 보며 시린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빕니다.

당장 내일모레면 우리나라의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합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딸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분도 휘영청 달 밝은 오늘 밤엔 만감이 교차하겠지 싶습니다. 환갑을 넘긴 그분의 생애가 어디 여염집 여인네의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이었겠습니까?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어머니를 흉탄에 잃고 아버지마저 심복의 손에 비명횡사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가슴에는 30년이 넘도록 독재자라는 주홍글씨가 선명하고 자신은 그 독재자의 딸이라는 원죄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으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한으로 점철된 일생, 공주가 무엇이며 퍼스트레이디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누가 뭐래도 부모의 한을 풀어드리고 온 국민이 그분들을 역사의 영웅으로 추앙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평생을 혼자 살아온 자식의 도리라는 것을 한순간인들 잊으셨겠습니까? 마침내 그분의 일념은 하늘을 감동시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에 쉽사리 잠이 오겠습니까?

천주교회의 제도를 아십니까? 천주교 신자의 자격 여부는 사제가 판단하고, 사제는 주교가 만들고, 주교는 교황이 임명합니다. 각 단위교회의 주임 사제와, 그 교회들이 모여 이룬 교구의 장(주교)은 자기가 책임을 맡고 있는 조직 안에서는 전권을 행사합니다. 어떠한 문제를 결정하기 전에는 여럿이 모여 회의도 하고 토론도 하지만 최종 결정 권한은 오로지 사제나 주교에게 있습니다. 신자 대부분의 의견이라도 사제가 “아니다” 하면 아닌 것이고 다수의 사제가 반대해도 주교가 하겠다면 하는 것입니다. 교황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제나 주교, 교황의 올바른 사고와 이성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만약 그들의 판단이 잘못됐다면 치명적인 과오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교회가 예수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치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그런데 간혹 그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솔직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그럴 수 있다는 변명은 거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온 다음입니다.

다시 정월대보름입니다. 새 대통령의 정책 결정이나 인사 스타일을 보면 우리 천주교회가 무색할 지경입니다. 베일에 가려 도무지 보이지 않는 그분만의 ‘고독한 결단’입니다. 교회의 극히 일부 성직자들처럼 나는 늘 옳지만 너는 틀릴 수 있다는, 그러니까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내가 받은 천명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소신이라는 이름의 독선을 카리스마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 대통령처럼 당신 한분을 제외한 모든 국민은 다 들러리가 되고 맙니다.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분은 투표자 과반수의 선택이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하늘의 마패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반면교사입니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우리의 새 대통령님이 제발 아버지의 부활을 자식된 도리로 여기지 않고 아버지를 훌쩍 넘어 민주와 평화의 길로 가는 것이 진정한 효도임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고백하건대 나는 그분을 찍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분은 ‘우리’가 선택한 우리의 대통령입니다. 우리의 제일 큰 머슴입니다. 잦은 지적과 아픈 비판은 그분과 우리 모두의 성공을 위한 애틋한 죽비입니다. 그리하여 5년 뒤에 그분이 이 땅의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 40)의 박수를 받으며 퇴임하기를 바랍니다.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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