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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킹스 필로소피’가 지배하는 나라

등록 2013-04-10 19:34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한국은 지금 철학 하는 나라다. 철학의 쇠퇴니 철학의 종언이니 하는 말은 한국에서는 거리가 먼 얘기다. 곳곳에서 철학 면학 열풍이 거세다. 이름하여 국정 철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적 사조다. 공무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정부에서 입신양명을 꿈꾸는 이들은 한결같이 이 철학 연구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 특허청 등 일부 발 빠른 부처에서는 외부 인사를 불러 ‘국정 철학 공유를 위한 명사 특강’이라는 릴레이 강의 프로그램도 개설했다. 철학 공부에서도 어김없이 사교육이 등장한 셈이다.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등극한 철인군주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마땅한 도리인 듯싶어 청와대 누리집에 들어가 보았다. 국정 철학의 첫 번째 항목인 시대적 소명을 보니 ‘행복한 국민, 행복한 한반도, 신뢰받는 모범국가’로 돼 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치고 ‘불행한 국민, 불행한 한반도, 불신받는 불량국가’를 원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한마디로 싱크로율 100%다. 다음 항목인 국정운영 기조는 국가발전의 패러다임을 국가 중심에서 국민 개개인으로, 경제성장 모델을 선진국 추격형에서 세계시장 선도형으로 바꾼다는 등의 내용이다. 이런 아름다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 상태를 의심해볼 일이다.

철학개론을 끝냈으니 각론을 공부할 차례다. 우선 요즘 신경제학으로 각광받는 ‘창조경제학’에 도전해 봤다. 그런데 난해하기 짝이 없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이런 때는 이 분야에 해박한 사람의 강의를 듣는 것이 최선인데 마침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장관 후보자로 낙점받은 분들이야말로 국정 철학 박사들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미래창조과학부를 맡을 최문기 장관 후보자의 설명을 들어봐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자신이 창조경제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답변 일색이다. 아무리 국정 철학을 공유하고 싶어도 공유할 길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눈길을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로 돌렸다. 그런데 이분의 철학은 ‘모른다의 철학’이다. 서양철학의 유명한 경구인 ‘무지의 지’, 아니면 동양의 ‘공(空)의 철학’에 뿌리를 둔 철학인지도 모른다. 주말에 텔레비전을 보니 ‘봉숭아학당’ 인사청문회는 여기저기서 코미디 소재로 활용돼 삶에 지친 국민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었다. ‘행복한 국민’을 만들자는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분인 게 확실하다.

윤 후보자의 경우가 희극이라면 홍기택 중앙대 교수의 산은금융그룹 회장 지명은 비극이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산하 기관과 공공기관 인사에서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하도록 노력하라”는 지시가 나온 뒤 이뤄진 첫 물갈이 인사다. 그런데 첫 번째 작품치고는 졸작도 이런 졸작이 없다. 경륜 부족, 전문성 결여에다 의심스러운 철학적 배경 등 삼박자를 고루 갖췄다. 현 정부가 추진하려는 금산 분리 강화에 반대해 왔고, 산업은행 민영화에도 찬성했다고 하니 대통령의 국정 철학마저 미심쩍어진다.

이쯤 되고 보면 청와대가 인사의 첫 번째 원칙으로 정한 국정 철학의 공유라는 게 무엇인지 도통 헷갈린다. 뜬구름 잡기의 철학, 모른다의 철학, 어긋남의 철학이 대통령의 국정 철학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순종의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인사 철학의 요체가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여러 말 가운데 ‘생겨남과 스러짐의 배후에 숨어 있는 깊은 원칙의 탐구’라는 설명이 있다. 국정 철학이라는 것도 하나의 철학이라면 결국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권력의 생겨남과 스러짐에 대한 겸허하고도 깊은 통찰에서부터 시작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국정 철학이 나오지 않을까. 특히 사람을 쓰고 버리는 일, 한 기관의 생성 및 지속과 깊이 관련된 인사 철학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국정 철학의 공유라는 선언에서는 어떤 철학적 성찰이나 고뇌도 묻어나지 않는다. 그 자체로 모든 것을 허망하게 만들어버리는 오만함이 이 선언에는 깃들어 있다. 한 나라를 단지 ‘킹스 필로소피’(king’s philosophy) 하나로 통치하기에는 우리는 이미 멀리 와 있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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