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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표정을 기부합니다 / 법인

등록 2013-05-24 18:58

법인  해남 일지암 암주
법인 해남 일지암 암주
어느 날 우연히 서울의 큰 빌딩 앞에서 본 생경한 아침 풍경 하나가 잊히지 않는다. 회사의 수위 아저씨는 아주 밝은 얼굴 가득히 상쾌한 소리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좋은 날입니다.” 옆에서 보는 내가 저절로 기운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 인사였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그 자리가 무언가 낯설고 어색했다. 그 까닭은 다름 아닌 일방적 인사였다. 그 회사의 직원들 대부분이 수위의 인사에 그저 고개만 숙여 대응할 뿐, 눈을 마주하지도 않고 간단한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표정 없는 마주침이다. 분명 수위와 직원들은 한 발쯤의 거리인데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를 벗어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시스템과 매뉴얼만 있고 인간의 온기가 사라진 관계가 일상적으로 발견된다. 백화점, 호텔, 항공기, 열차, 고급 음식점 등에서 보게 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곳에는 종사하는 직원들의 미소와 깍듯한 인사가 있다. 그런데 그곳의 손님들은 대부분 인사와 미소에 응답하지 않는다. 일방적 관계가 당연한 관행인 듯하다. 성의 있는 눈길의 마주함과 마음 있는 표정의 부딪침에서 기쁨과 사랑이 발생하는 법인데 사이가 이러하니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계는 소통을 하고 있는데 인간은 불통을 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긴장과 억압의 일방적 관계 또한 곳곳에서 발생한다. 최근 큰 기업과 대리점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감정노동자는 서글프고 경제적 약자는 억울하다. 그래도 ‘갑’에게 ‘을’은 자신의 표정을 숨겨야 한다. 당장에 ‘밥줄’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존엄한 인간이 밥 때문에 속내를 드러내는 맨얼굴을 숨기고 무표정하거나 비굴한 표정으로 화장까지 해야 한다. 이 모두가 돈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본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돈의 시선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깊이 생각해 보자. 존엄해야 할 우리들의 ‘밥’과 ‘마음’이 돈에 휘둘리고 있는 현실을, 그리하여 돈으로 친절과 복종을 사고 그 사이에서 잠시 우쭐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이웃 사람의 감정을 억압하고 존엄을 짓밟아 얻는 행복은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픈 것인가.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돌이켜야 할 지점에 있다. 우리, 서로, 모두가, 존엄해지기 위해서, 이웃에 대한 나의 표정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표정을 살리기 위해서 먼저 이웃에 대한 시선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먼저 나에 대한 시선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너에 대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서로가 갑과 을이라는 허망한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하면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너에 대한 시선이 열릴 것이다. 그 열린 눈에 비친 너와 나는 거래의 관계가 아닌 도움과 은혜로 얽힌 고마운 관계로 오지 않겠는가.

언젠가 식당에서 본 흐뭇한 일이 생각난다. 일이 바빠 급하게 움직이다가 종업원이 손님의 옷에 음식을 쏟았다. 종업원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손님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집에 가서 세탁기에 돌리면 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나는 그때 그 남자의 얼굴에서 미안해하는 이웃의 마음까지 헤아리고 따뜻하게 보듬는 마음을 보았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는 얼굴은 번역과 통역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이다. 그날 그곳에서 돈이 들지 않는 표정을 기부한 그 남자, 그 자리에 갑과 을은 존재하지 않았다.

법인 해남 일지암 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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