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올해 큰애가 한 대학의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지인들로부터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았다. 아이를 대학에 보냈거나 입시를 앞둔 엄마들은 손뼉까지 치면서 제 일처럼 기뻐했다. 축하의 말끝에 측은한 눈빛을 보낸 분들은 글을 쓰는 선배들이었다. 아이까지 그 힘든 일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안쓰러워진 것이다.
그즈음 시골 사는 이모부가 일톤 트럭을 몰고 서울에 왔다. 쌀자루와 파, 나물이 담긴 봉지들을 집 안으로 들여놓고 거실에 앉았는데 그새 친정엄마가 손녀 자랑을 늘어놓은 것이다.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여름방학이면 우리는 외가 대신 이모네로 놀러 가곤 했다. 무뚝뚝한 이모보다는 살가운 이모부가 더 좋았다. 이모부가 모는 경운기에 올라타고 논으로 가고 가끔 갯벌로 조개를 잡으러 나가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다. 이모부가 밭을 매고 있다가 비행기가 날아가자 허리를 펴고 밭둑에 앉아 놀던 우리에게 말했다. “여자 직업 중에는 저게 일등 직업이여, 일등!” 항공사 승무원을 꼭 꼬집어 이야기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처럼 높은 이상을 가지라는 말로 늘 생각해왔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구욱무운학과?” 양반다리로 앉아 거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이모부가 반문했다. 이모부에게서 쏟아질 감탄사를 기대하고 있던 엄마의 표정이 굳었다. 느릿느릿 이모부는 엄마가 생각지도 않았던 말만 골라 했다. “거기 나와 뭐에 쓴대유?” 친정엄마는 어이가 없었다. 국문학과를 나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을 떠올리다가 그만 나를 예로 들고 말았다. “봐유! 제 밥벌이 하난 똑똑히 허쥬?”
이모부는 평생 농사만 지었지만 아침이면 조간 읽는 일을 한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서울 사는 엄마보다도 훨씬 더 세상 물정을 꿰고 있었다. 이모부의 얼굴에는 알듯 말듯 웃음이 번졌다. 이모부가 애먼 데를 보면서 한마디 또 툭 던졌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간유? 그류, 안 그류?”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엄마에게 사실 나는 국문학과가 아니라 문예창작과 공부를 했다고 바로잡지 못했다. 이모부의 말처럼 국문학과를 비롯한 인문학과가 취업에 약한 과가 된 지 오래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가진 그 어떠한 말로도 이모부 하나 설득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조금 놀라 있었다. 이모부는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배재대학교의 학과 구조 조정 소식을 들었다. 국어국문학과와 독일어문화학과, 프랑스어문화학과가 사실상 폐과되고 취업률이 높은 항공운항과와 사이버보안학과 등이 신설될 예정이다. ‘심리철학과’가 ‘심리철학상담학과’로, 남아 있는 학과 또한 이런 식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대학이라기보다는 직업학교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는 이름들이다. 교육과학기술부의 평가에서 취업률이 낮아 부실 대학으로 지정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오갈 데 없어진 학생들은 애가 닳았다. ‘배재대에서 배제되었네.’ 학생들이 들고 있던 피켓의 한 문구이다. 말장난 같은 이 문구를 적어 내려갈 때 학생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대학’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대학만의 고집도 자긍심도 없다. 요즘 언론을 뜨겁게 달궜던 슈퍼갑의 횡포와 다를 게 없다. 또다른 밀어내기이다.
땡볕이 내리쬐던 여름날, 이모부와 함께 푸른 하늘을 날아가던 비행기를 오래오래 올려다보았다. 이모부의 그 말에 마음속에서 뭔가 움직였다. 비행기를 함께 올려다보던 동생은 승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이모부의 검게 탄 얼굴과 햇빛 다글다글 끓어오르던 넓은 밭이 떠오른다. 우리는 둘 다 열심히 살고 있다. 이모부의 말을 오해했던 걸 후회하지 않는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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