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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항복’하고도 분노하지 않는 검찰

등록 2013-06-12 18:57수정 2013-06-13 11:38

[김종구 칼럼]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시간 끌기라는 절묘한 전략을 구사했다. 성을 에워싼 채 포위를 풀지 않고 하염없이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치졸한 작전이었으나 이 계략은 맞아떨어졌다. 시일이 흐르면서 성안에 비축한 식량(공소시효)은 바닥이 나고 더는 성을 지키는 게 무의미한 시점이 도래했다. 성안의 군사들은 스스로 성문을 열고 걸어나왔다. “장관이 저렇게 틀어쥐고 있으면 방법이 없다”는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봉쇄작전이 펼쳐지는 동안 성안의 장수들이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렸다는 이야기도 한동안 나돌았다. 특수통 검사들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에 적극적인 반면 공안통 검사들은 신중한 입장이라는 말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대다수 언론의 일치된 취재 결과는 검찰 내부에서는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한 구속영장 청구’라는 기본원칙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는 쪽이었다. 검찰이 그 어느 때보다 일치단결해 법과 원칙을 지키려는 분위기에 충만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건곤일척 대결이 과연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지켜보는 이들도 손에 땀을 쥐었다.

하지만 언론들의 취재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검찰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일까. 원 전 원장에 대한 불구속 기소 방침 발표 이후 검찰이 보이는 태도를 보면 애초 그런 결기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사태평하다. 일치된 목소리는 그만두고 척화파의 목소리도, 주화파의 목소리도 없이 물속처럼 고요하다.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하고도 치욕이라고 느끼지도 않는 모습이다. 긴장했던 관객이 오히려 무색해질 정도다.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검찰의 선천적 허약 체질 디엔에이를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이번 사건 처리를 두고 절충이니 타협이니 말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검찰이 백기를 들었다는 표현이 더 타당하다. 전임 정부의 정보기관 최고 수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지니는 무게는 실로 가볍지 않다. 사법정의나 법치주의 구현, 죄질의 정도, 형평성 등 모든 면에서 결코 물러서기 힘든 상황이었다. 검찰이 일찌감치 불구속 기소로 후퇴했다면 지루한 밀고당기기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형식은 절충이지만 내용은 검찰의 항복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타협과 절충이라는 안온한 단어 속에 스스로를 위안하며 남루한 자족감을 즐기고 있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첫손가락으로 정명(正名)을 꼽았다. “이름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말(言)이 서지 않고, 말이 서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른바 ‘정명론’이다. 그런데 원세훈 전 원장 사건 처리 과정에서처럼 말과 실제가 어긋나고 뒤틀린 경우도 보기 힘들다. 수사 방해와 수사 간섭은 ‘의견 교환’이란 고상한 말로 둔갑했고, 수사 지휘, 구속 승인 등이 버젓이 활개를 쳤는데도 ‘정상적인 절차’라고 강변했다. 이름이 바로 서지 않으니 말이 서지 않고, 말이 서지 않으니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파행적 처리는 이미 예고됐던 셈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청와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정명이 미진하면 선정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법”이라고 했는데 권력자들이 이처럼 말을 비틀고 언어를 희롱하니 좋은 정치를 기대하기란 틀렸다.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검찰은 원 전 원장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함으로써 국정원의 정치 관여나 선거 개입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고 자평한다.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처럼 선거 때마다 정권의 눈치를 보며 행동하는 공직자들을 따끔히 일깨우는 효과도 기대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검찰에는 어떤 종이 울렸을까. 경종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조종(弔鐘)이 울린 것은 아닐까.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처리 문제는 ‘채동욱 검찰총장 체제’의 순항, 나아가서는 검찰 거듭나기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는 애초의 관측을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정당한 분노는 희망을 향한 갈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검찰은 분노하지도 않는다. 국민이 분노하고 검찰이 자족하는 아이러니, 이 속에 검찰의 비극이 깃들어 있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관련영상] 국기문란 국정원, 개혁될까? (한겨레캐스트#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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