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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파원 칼럼] 요설의 생명력 / 성연철

등록 2013-06-13 19:00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기자에게 오보는 웬만하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단어다. 신문의 공신력과 독자의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거창한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다. 당장 기자 자신이 등줄기가 오싹하고 뒷골이 땅긴다. ‘정론직필’만큼이나 ‘정론속필’을 요구하는 우리네 언론 속성상 특종과 오보는 그 순간엔 종이 한 장만큼의 차이도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최근 중국 언론에서 수차례의 석연찮은 ‘오보’가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말 한 홍콩 언론은 왕치산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기율위) 서기 겸 정치국 상무위원의 발언을 잘못 전달했다고 독자들에게 사과했다. 이 매체는 왕 서기가 5월 기율위 회의에서 “장관급 이상 고위직 공무원들에게 유학중인 자녀가 있으면 1년 안에 귀국시키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이 보도는 영국 <비비시> 등 외신들은 물론이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도 인용했다. 하지만 보도 이틀 뒤 이 매체는 “이 소식이 널리 퍼지는 것을 우려한 검열 당국의 지시에 따라” 기사를 내리고 정정 사과문을 올렸다.

쿤밍에서도 지방정부가 일부 언론 보도를 오보라고 반박하는 일이 있었다. 쿤밍에선 대형 국유 에너지기업인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CNPC)의 화학공장 건설 계획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벌어진 바 있다. 시 당국은 앞서 집회 참가자들 다수가 “NO PX(유독물질인 파라크실렌의 약자)”란 반대 구호를 쓴 마스크를 착용하자 판매를 금지하고, 상점에서 살 때는 신원을 밝히라는 조잡한 대응을 해 뭇매를 맞았다. 그랬던 당국이 “반대 구호를 쓸 수 있는 흰 티 판매도 금지시켰다”는 보도가 나오자 “요설이자 오보”라고 반박했다. 달포 전으로 거슬러 가면 시진핑 주석이 베이징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일범풍순’(一帆風順)이란 글자도 선물했다는 보도를 한 <다궁바오>(대공보)가 자세한 설명 없이 이를 오보라고 정정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기사들을 들여다보면 오보라고만 하기엔 납득하기 힘든 대목이 많다. 왕치산 서기의 말은 보도 이틀 뒤에야 뒤늦게 ‘검열 당국의 개입’으로 정정됐고, 쿤밍 지방정부도 황당한 마스크 판매 금지 보도에 대해 발뺌했다. 시진핑의 택시 탑승 기사는 관영 <신화통신>까지 처음엔 사실이라고 했다가 태도를 바꿨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왕 서기가 보도된 내용과 같은 언급을 했거나, 시 주석이 택시를 탔지만 “너무 튀는 행동과 발언”이라는 당 내부의 비판에 따라 뒤늦게 이를 오보로 ‘마사지했다’는 의구심이 여전하다. 진짜 오보가 아닌 당국과 당국의 통제를 받는 언론이 ‘사후 오보’를 합작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 인민들은 종종 관과 ‘관제’ 언론 모두를 신뢰하지 않는다.

중국에선 유언비어나 헛소문을 퍼뜨리는 일을 ‘야오촨’(謠傳)이라고 한다. 언로가 통제된 사회에서 ‘야오촨’은 사실만큼의 위력을 지닐 때가 있다. 정확하고 투명하게 사실을 전달받을 권리가 제한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진실이라고 여길 권리와 자유를 암암리에 공유한다. 이런 권리와 자유는 냉소나 자조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부패 척결이나 개혁 등 정부의 정책 보도에 달린 중국 누리꾼들의 댓글 중에 직접적인 반대나 비판보다 유난히 비꼼이나 불신, 냉소 형식의 댓글이 많은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인민과의 소통보다는 당과 체제 안정을 택한 중국 공산당으로선 ‘불신’도 스스로 감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인지 모른다.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13일에도 “미성숙한 누리꾼과 당국의 미비한 관리 탓에 야오촨이 급증하고 있다”며 단속을 촉구하고 있다. 정말 미성숙과 단속 부실만의 문제일까?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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