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 해남 일지암 암주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이 큰 잘못을 했을 때 체벌 대신 반성문을 쓰게 했다. 우리는 매를 맞거나 손을 들고 서 있는 벌을 받지 않아도 되니 처음에는 매우 좋아했다. 그런데 반성문이 그렇게 좋아할 벌칙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친구를 때리고 괴롭혀서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쓰면 용서받을 줄 알았던 우리들 순진한 생각을 선생님은 대충 넘기지 않았다. 진정한 부끄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의 반성문은 여러 번 퇴짜를 맞았다. 몇 차례 반성문을 고쳐 쓰는 동안 차라리 매를 맞았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마음에 들 때까지 반성문 고쳐 쓰기는 되풀이되었다.
너는 왜 친구를 괴롭혔는가. 친구에게 모욕과 고통을 주어야겠다는 너의 생각은 옳은 것인가. 친구에게 고통을 준 방법은 어떤가. 고통을 당한 친구의 아픔을 생각해 보았는가. 친구를 괴롭히고 나서 너의 마음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너는 지금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있는가. 선생님이 원했던 반성문의 내용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렇게 반성문을 고쳐 쓰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반성문이 완성되면 선생님은 그 내용 그대로 편지를 써서 나에게 고통을 당한 친구에게 전해주고 사과하게 했다. 그러면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고 친구의 상처는 치유되었고 우리들은 다시 우정을 되찾았다. 내 유년의 소중한 기억이다. 그때 우리들은 반성문을 쓰면서 사과는 진심을 담아야 하고 매우 정직하고 구체적인 말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의 반성문은 어떤가. 우리 사회의 힘 있는 이들의 반성문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매우 모호하고 표정 없는 문법으로 사과한다는 것이다.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본의는 아니었습니다만 고통을 당한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이런 반성문은 사과라기보다는 일방적 선언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 무장세력이 침투했다는 증언이 최근 종합편성채널을 통해 보도되었다. 이 보도에 대한 여론이 들끓자 해당 채널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사실 그것은 사과문이 아니라 여론의 압력에 굴복한 항복문서에 불과했다. 그 문제를 다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소위원회에서 해당 종편의 책임 있는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본질이나 희생자들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는 없었다. 충분히 검증하지 못한 점은 인정한다.” 이 말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충분히 검증할 시간과 능력이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방송을 내보냈다. 당시 북한군 무장세력이 침투했다고 믿고 싶은 보수세력의 흥미를 돋우어 시청률을 올려보고 싶었던 것이 ‘본의’가 아닐까. 어처구니없는 이 방송은 마치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가 튀는 행동으로 남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 행동과 닮은 꼴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스라엘 의회 연설에서 행한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의 참회는 종편의 문법과는 너무도 다르다. “독일인은 과거에 저지른 범죄를 잊어서도 안 되고 결코 떨쳐버리려 해서도 안 됩니다.”
많이 배웠으나 잘못 배운 사람들은 대개 모호한 문법으로 사과한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진실의 핵심과 책임을 피해가고 싶기 때문이다. 사과문은 정확한 문법으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이제, 우리 시대의 진실한 화해를 위하여, 모호한 문법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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