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도쿄 특파원
만약 내가 전아무개(나는 이 사람을 대통령이라 결코 부르지 않는다)를 지근거리에서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크게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기자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을까?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자 일을 시작하면서 이런 고민을 했다. 그렇게 만나는 일이 없기를 그저 바랐다. 나는 그가 저지른 학살과 민주주의 말살, 인권 탄압으로 직접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한 짓을 아직 용서할 수가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재일동포였던 그 남자는 한국에 갔다가 영문도 모르고 수사기관에 붙잡혀갔다. 모진 고문을 받고 간첩이라고 자백하고, 몇해를 감옥에서 보냈다.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몸과 마음도 이미 망가져 버렸다. 울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하루는 손도끼를 사고, 그다음 날은 시퍼런 칼을 샀다. 아내가 그것을 버리면 또 새로 샀다.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흘러갔는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러다 내가 악마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는 마음에서 울분을 지워내고, 가해자들의 얼굴을 기억에서 지워내려 갖은 애를 썼다고 한다. 지금은 평온해졌다는데, 그는 과연 가해자들을 용서한 것일까? 그가 용서했다면 그것으로 끝이어도 좋을까?
지난 7일 도쿄 나카노구의 나카노제로에서 영화 <남영동 1985> 상영회가 열렸다. 일본인과 재일동포 등 530명이 좌석을 빈틈없이 채웠다. 관객 대부분은 영화가 끝나고도 거의 한시간 동안 감독과 배우의 말을 듣느라 자리를 뜨지 않았다. 거기엔 아주 특별한 이들이 몇명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들이었다. 정지영 감독의 말대로 “고통스런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할 괴로움을 무릅쓰고 이 영화 상영회를 앞장서 주최”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가운데는 상영장을 찾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재일동포 간첩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160명가량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몇해 동안 그 가운데 20여명이 재심을 신청했다. 신청은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이미 재판이 시작된 사건에서, 15명가량은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된 것으로 결론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재심 같은 데 관심 없다. 한국이라면 떠올리기도 싫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디론가 숨어버려 연락조차 닿지 않는 이들의 수는 훨씬 많다. 이미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한 피해자에게 영화를 본 소감을 물었다. 그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이 겪은 고통이 그저 운 없는 이들이 겪은 불행한 개인사인가? 만약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고민스런 것은 출세를 위해, 혹은 보신을 위해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사람들을 어찌해야 하느냐다. 그들도 시대의 피해자라고? 권력을 찬탈한 이들에게 빌붙어, 고문으로 가짜 간첩과 혁명분자를 만들어낸 전문가들, 그들을 전담하다시피 기소한 검사, 따져보고 말 것도 없이 그들에게 유죄 판결문을 복사하듯 찍어낸 판사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지금도 한국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이들이 있다.
영화를 본 한 일본인이 동료들과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 “역사로부터 달아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부한 표현일지 모르나,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국가정보원이 선거와 정치에 개입하는 등 힘겹게 쟁취한 한국의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그 정신으로 이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이들의 인명사전을 만들자. 조사하여 기록하고, 기억하고, 물려주자.
정남구 도쿄 특파원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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