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백열

등록 2013-07-21 19:12

남북 문인 교류를 위해 북한에 다녀온 선배가 들려준 ‘전구 시리즈’가 있다. 휘황한 전등으로 빛나는 만찬장에서 들었다며 그가 전한 내용은 대충 이랬다. “북에서는 전구를 불이 들어오는 알, ‘불알’이라고 한다. 형광등은 ‘긴불알’이고, 거기에 꽂혀 있는 점등관은 ‘씨불알’이다. ‘불알’ 여럿으로 만든 것은 ‘떼불알’, 가로등은 ‘선불알’이다….” 하지만 북한 사람 만나서 ‘불알’ 얘기 꺼내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이 얘기는 한자어와 외래어 다듬어 쓰는 북한 언어 정책을 비틀어 지어낸 것일 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우스개가 농담을 넘어 진담처럼 퍼져 있다. 그냥 떠도는 게 아니라 ㄱ 교수(ㅅ스포츠신문 칼럼), ㄱ 논설위원(ㅅ신문)처럼 일부에서는 사실인 양 받아들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북한에서는 샹들리에를 ‘무리등’(여러 개의 전등알이나 갖가지 모양의 형광등으로 이루어진 큰 조명등)이라 하지만 ‘샨데리야’도 적지 않게 쓰인다. 흔히 ‘스타트전구(램프)’라 하는 점등관(글로스타터)은 북한 사전에 ‘글로우스위치’(glow switch)로 올라 있기도 하다. 표기 방식의 차이일 뿐 북한도 외래어를 제한적으로나마 쓰고 있는 것이다. 남한의 ‘꼬마전구’는 북한에 가면 ‘콩알전구’가 된다. ‘전등알’(전기알), ‘등알’은 전구를 두루 이르는 북한말이다.(표준국어대사전) ‘내년부터 백열전구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전구 시리즈’를 떠올렸지만 ‘백열전구’에 담긴 뜻도 새겨볼 만하다. ‘백열’(白熱)의 뜻은 ‘물체가 흰빛이 날 만큼 온도가 높음’, ‘최고조로 오른 기운이나 열정’이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백열’은 물리 현상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백열하다’, ‘백열적이다’처럼 인성을 드러낼 때도 쓰는 표현인 것이다. 새 기술에 밀려 백열전구는 사라지지만 그 불빛 아래에서 일하고 바느질하고 공부하던 우리의 백열함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한겨레 인기기사>

고은 시인이 두번 귀를 빼앗겨 ‘헛귀’로 살게 된 사연
새벽 5시 육수가 팔팔 끓기 시작했다…평양냉면집 을밀대의 하루
육사 생도의 섹스와 퇴학…그대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
[단독] 뚜레쥬르 가맹점주들에 ‘세금 폭탄’…프랜차이즈업계 ‘초비상’
[화보] 물대포·소화기에 가로막힌 울산 현대차 ‘희망버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