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대학의 신입생 환영회 자리였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예비역으로 보이는 한 선배가 들어와 교탁 앞에 섰다. 비딱하게 우리를 내려다보던 그가 말했다. “이제 자리에 앉는다.” 대번 반말이었다. 명령조의 말투도 거슬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고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랐다는 것이다.
한 시간이 넘도록 그는 예의 그 말투로 이야기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전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누구나 다 알 만한 학칙이었다. 대체 분위기를 왜 이렇게 무겁게 만드느냐고 몇 번이나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럴 때 남자애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둘러보았지만 군기가 바짝 들어간 건 남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20년도 더 흘렀지만 가끔 그 상황이 떠오르면 실소부터 터진다. 그가 나가고 난 뒤에야 그가 군 시절 조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군 문화를 체험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일 뒤로 그에게 반해 그를 쫓아다닌 여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일을 시작으로 남자들에 대해 몰랐던 점들을 알게 되었다. 남자들은 특히 군 문제에 예민했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를 하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하면 한둘쯤 겉도는 남자애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군 면제자이거나 방위 출신이라는 것도 눈치로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 한 선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해병대 출신이야. 그것도 자원이야, 자원!” 우, 탄성이 터졌다. 나도 모르게 “와, 귀신 잡는 해병이요?” 하고 거들었다. 남자 형제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그 말을 알았던 걸 보면 해병대의 위상이라는 것이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다. 혹시나 그가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거들먹거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신중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나자 호감은 배가 되었다. 남자들도 다 힘들다고 하는 해병대 훈련을 마치고 이렇게 돌아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원이라지 않는가, 자원.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었지만 사실은 그 선배,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회인이 되었는데도 왜 줄기차게 야상을 걸치고 다녔던 것일까. 전역하는 순간 추억의 상자 속으로나 들어가야 할 군번줄을 애지중지 목에 걸고 다녔던 것일까. 그리고 왜 나는 그가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그가 더욱 남자답게 느껴졌던 것일까.
해병대에 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이 붙었는지도 나중에야 알았다. 한국전쟁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해병대에 대한 한 종군기자가 쓴 기사에서 유래했다. ‘그들은 악마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악마(devil)가 ‘귀신’으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왜 남자라면 군대에 다녀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남자 형제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면서. 그럼 누누이 그런 말로 나를 세뇌시킨 이들은 누구였을까. 혹시나 그런 선입견으로 우리는 아이들을 해병대 캠프 같은 곳에 보내는 건 아닐까. 힘든 시간을 극복하고 진짜 사나이로 성장하리라 믿었던 것은 아닐까.
20여년 전 한 선배의 명령조의 말투에 바짝 군기가 들었던 것처럼 아이들은 조교의 명령에 구명조끼도 없이 바다로 들어갔다. 누구 하나 위험한 것 아니냐고 반박할 수 없었다. 그곳은 상명하복이 엄연히 존재하는 군대였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다섯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 뒤에야 뒤돌아보게 된다. 진짜 사나이에 대해.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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