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야성(野性)이라는 말에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순수하고 황홀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잡초와 같은 끈질김, 거친 들판을 질주하는 패기, 활시위를 당긴 듯한 팽팽한 긴장과 탄력감 등이 전해온다. 우리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큰 원동력도 권력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 불의에 잠들지 않는 저항정신이었다. 그리고 그 행렬의 앞줄에는 야당도 함께 있었다. 야당한테 ‘야썽’은 존재 이유이자 매력이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민주당을 보면 왠지 야성이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해진다. 아니, 민주당 스스로 야성이라는 말을 꺼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혐오와 기피 증상은 시대적 대세로 자리잡았고 이 점에서 민주당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야성 대신 민주당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 같다. 남에게 사랑받으려면 반듯한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싸움질이나 일삼으며 먹고사는 일을 등한시하는 인상을 주어서는 앞날이 없다는 불안감이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다. 백령도에서 최고위원회를 열려던 계획이나, ‘한 손에 민생, 한 손에 민주주의’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시때때로 여당 지도부와 폭탄 화합주를 마시는 모습 등은 모두 안보 열등생, 민생 열등생, 화합 강박증의 콤플렉스에서 나온 착한 아이 증후군으로 보인다. 콤플렉스에 빠진 이의 행동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타인의 시선이다. 민주당에 타인의 시선은 대중의 여론이고 당의 이미지다.
인기와 표를 먹고사는 정당에 여론과 이미지는 중요하다. 콤플렉스가 때로는 앞에 가로놓인 장애물을 극복하고 새로운 성취를 이루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민주당의 콤플렉스가 잇따른 선거 패배에 대한 자성의 결과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스트레스가 사고와 행동을 심각하게 옥죄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지금의 새누리당은 민주당이 대적하기에 너무나 벅찬 상대인 것은 분명하다. 수적인 우위와 탄탄한 조직력, 영악한 계산과 발 빠른 행동, 여기에다 몽니, 물타기, 덮어씌우기 등등 각종 다양하고 현란한 싸움의 기술까지 갖췄다. ‘막무가내=야당’ ‘달래기=여당’이라는 공식이 깨진 지는 이미 오래됐다. 이런 새누리당을 놓아두고 민주당의 잘못을 나무라는 것이 야당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간교한 여당’이 ‘무능한 야당’의 항소이유서가 될 수는 없다.
정치권의 소모적인 싸움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싸움은 정치의 본령이다. 정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바로 정치다. ‘정쟁’ 없는 정치의 칭송은 독재를 향한 찬양가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다.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의 복원, 국가정보원의 근원적 개혁 등 중차대한 시대적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도 야당은 스스로를 정쟁의 프레임에 가두어 버렸다. 민주당이 그 음험한 덫에 갇혔을 때부터 이미 패배는 예고된 것이었다.
싸움 잘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내세울 일은 아니지만 만날 코피 터지고 집에 돌아오는 것은 더욱 자랑이 될 수 없다. ‘싸움질하는 야당’보다 오히려 더욱 한심한 것은 ‘싸우기만 하면 지는 야당’이다. 민주당은 ‘인내’니 ‘솔로몬의 지혜’니 하며 패배의 이유를 설명하지만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차라리 실력의 부족, 머리와 체력의 열세, 손발이 안 맞는 못난 집안 꼴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굴종을 인내심으로 포장할 일도 아니고, 무기력과 무능함을 양보와 겸양으로 눙치고 넘어갈 일도 아니다. 고작해야 백령도 최고회의 등 상대방이 써먹은 방식이나 뒤쫓아가는 상상력의 빈곤으로 막강한 여당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원외투쟁만이 능사는 아니다. 거리로 나가 촛불과 결합하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민주당은 여태껏 화살도 없이 활시위만 계속 당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길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열려 있다. 전략의 부재도 결국 치열한 정신의 부족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다. 지금 민심은 새누리당보다 오히려 민주당에 더 분노하고 있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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