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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사제들의 시국선언 / 호인수

등록 2013-08-09 18:52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천주교 부산교구를 필두로 해 전국 각 교구에서 사제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진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정의평화위원회 등 교회 안의 공식·비공식 조직이 아닌 교구사제단 명의로 이렇게 많은 사제들이 뜻을 모아 한목소리를 내기는 근래에 드문 일이다. 국가정보원의 기고만장한 불법행위와 대통령의 시치미를 마냥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사제적 양심의 발로다. 박수갈채도 크지만 비난 또한 적지 않음을 나는 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지난 2000년 12월,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쇄신과 화해’라는 제목의 과거사 반성문을 발표했다. 이 문건에서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대국민 고해성사를 한 것이다. (고해성사라는 천주교회 용어는 언제부턴가 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전혀 생소하지 않은 말이 됐다.)

“우리 교회는 박해 시대에 외세에 힘입어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지키고자 한 적도 있었으며 외국의 부당한 압력에 편승하기도 했다.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했다. 분단 상황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지닌 지역과 계층,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나 장애인 외국인 근로자 등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인권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노력이 부족했다. 모든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올바른 양심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지 못했다. 성직자들이 사회의 도덕적·윤리적 귀감이 되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빠지거나 외적 성장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등 세상 풍조를 따르는 때가 많았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교회의 무관심과 방관, 잘못으로 하여 상처받은 분들에게 용서를 청한다. 우리는 참회를 통하여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겠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이 사회도 교회도 달라진 게 별로 없는(오히려 나날이 악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또 똑같은 고해성사를 반복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진정한 고해성사 없이 용서와 화해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우리 사제들에게는 이미 상식이요 신앙이다. 사제들은 그래서 10여년 전 주교들의 참회를 되새기며 무소불위의 권력자들을 향하여 예수처럼 아픈 마음으로 어렵게 채찍(요한 2. 15)을 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에 ‘스스로 개혁’을 주문한 것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이 기회에 반드시 국정원을 개혁하겠다는 최고통치자의 강력한 의지는 보이지 않고 그저 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식의 하나 마나 한 면피성 발언 정도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정당한 임무수행이었다고 빳빳하게 우기는 상대에게 스스로 개혁을 권하니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소가 웃는다. 이런 사기극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양쪽 진영의 사병들뿐이다. 평생 고해성사를 하고 듣는 사제들의 눈이 놓칠 리 없다.

한종호 목사는 <한겨레>에 쓴 칼럼 ‘예수 팔아 장사회’에서 “국가의 권력기관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대다수의 교회는 묵묵부답이다.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대화의 길이 막혀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눈이 먼 자들이 교회를 주름잡고 있다”고 통탄하지만 정치집단인 야당도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지금, 교회의 사제들마저 눈감고 입 닫고 있다면 그 영향력의 크고 작음과는 상관없이 직무유기다. 나도 내 동료 선후배 사제들과 함께 결코 그럴 수는 없다는 결의로 서명했다.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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