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택 논설위원
“저걸 대선 때 확 깠어야 되는 건데.”
지난 17일 서울경찰청 디지털증거분석실 폐회로티브이 동영상이 상영되던 서울광장 한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엔 짙은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지난해 12월16일 서울청 분석팀은 이미 댓글 실체를 알고 있었으나 경찰 발표 내용은 정반대였다. 그 영상을 보면, 문재인 후보 지지자가 아니라도 경찰 발표가 제대로 됐다면 선거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국회 청문회에서 여당의 지원을 받은 국정원과 경찰 간부들이 입을 맞춘 듯 변명을 내놓았으나, 검찰 공소장 한번 훑어보고 <뉴스타파>에 들러 증거분석실 동영상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국정원·경찰 논리는 한방에 깨지게 돼 있다.
“빠~바바바 ‘다음 대선에서 문재인이 당선될 수 없는 이유’를 토탈리쿨이 추천했습니다.”(12월15일 오후 10시49분)
“숲속의 참치가 많이 보이네. 문재인 깔 때는.”(12월16일 새벽 1시22분)
‘토탈리쿨’과 ‘숲속의 참치’ 모두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의 닉네임이다. 증거분석 경찰들이 그렇게 확인해놓고도 경찰은 16일 밤 11시 ‘문재인 박근혜 후보 지지·비방 댓글 발견되지 않음’이라고 보도자료를 배포했으니 국민을 속였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대북심리전이라고 했지만 찬반 클릭 게시글 중 종북 관련 내용은 2.7%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정부 홍보나 야당 비판 일색이다. 매뉴얼까지 정해놓고 국정원장이 수시로 댓글 목록까지 보고받았다니 대북심리전이 아니라 대남심리전이었음이 분명하다. 미끼글이라고 변명하지만 미끼 크기가 월척만하고 그걸로 낚았다는 고기도 통 안 보이니 이것도 얘기가 안 된다.
뉴스타파 동영상을 본 사람만 20만에 이를 정도로 국민들은 ‘진실’을 이미 눈치챘다. <조선일보> 여론조사에서도 13.6%만 국정원 주장에 공감할 정도라면 대북심리전 논리가 거의 먹혀들지 않았다는 얘기다. 재판까지 시작됐으니 대선개입 ‘진상’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보통사람들과는 사고방식이 많이 다른 것 같다.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고 한 것은 무지 아니면 뻔뻔함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지지도가 60%를 넘는다고 해서 동영상과 댓글이 말하는 진실까지 뒤집을 수는 없다. 만일 그날 밤 경찰이 “국정원 직원이 ‘다음 대선에서 문재인이 당선될 수 없는 이유’를 추천하고 댓글까지 단 사실이 발견돼 수사중”이라고 발표했다면 중간층 표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또 김무성 선대위 총괄본부장이 12월14일 부산 유세에서 줄줄이 읽은 정상회담 대화록은 어디서 나왔나. 국정원만 보관하고 있었다니 국정원 도움 없이는 입수가 불가능한 자료다. 이래도 국정원 도움이 없었다고 우길 텐가.
‘민생’ 운운하면서 오히려 야당을 민생국회 대신 거리로 떠미는 대통령 발언이 정국을 더 꼬이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게 법원·검찰 문제다. 한창 재판과 보충수사가 진행중인 사건에 대해 이해관계자인 대통령이 두 번씩이나 사실상 ‘선거법 위반 아니다’라는 속내를 드러냈으니 판검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를 고집하고 채동욱 검찰총장 후보 교체를 검토하더니 국정원 사건 대응 못 했다고 민정수석까지 경질한 것을 판검사들이 다 지켜봤다. 여기에 판검사를 하수인으로 여기는 시대에 함께 청와대에 있던 김기춘 비서실장까지 들어앉혔다. 이 정권 임기 안엔 출세를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지 않고서는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고 독립적으로 수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게 더 걱정이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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