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1985년 12월, 우리는 학교 정문을 빠져나와 혜화동 로터리 쪽으로 걸어갔다. 학생들이 귀가한 늦은 오후의 교정은 쓸쓸했다. 우리는 텅 빈 교실에 남아 원고를 수정하고 봉투에 넣어 풀로 단단히 입구를 봉했다. 혜화우체국까지는 버스로 네 정거장, 결코 걷기에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칼바람을 맞으며 그곳까지 걸었다. 비장했다. 우체국에 들어가 직원에게 봉투를 내밀 무렵에야 두 손이 얼어 잘 펴지지도 않는 걸 알았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3학년인 문학소녀들을 부추긴 건 오래전 신화로 남은 한 남학생이었다. 그의 이름은 최인호.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입선했다는 이야기가 20여년 뒤의 문학소녀들을 자극했다. 우리가 태어나던 1967년, 그는 다른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 정식 등단하게 되는데 투고작과 함께 당선소감을 보내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
물론 그해 신문사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포기하지 않고 10년간 꾸준히 투고를 할 수 있었던 건 처음 시작을 밀어준 그 남학생 덕이었다.
그 남학생을 처음 만난 건 한 출판사의 출판기념회 자리였다. 젊은 작가 몇이 최인호 선생의 글에 추천사를 쓴 것이 인연이었는데 선생은 한참 아래의 후배들 이름은 물론이고 소설까지도 꿰고 있었다. 상상 속의 남학생은 더 이상 까까머리 남학생이 아니었지만 다부진 체격과 장난기가 밴 눈가에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만남은 유쾌했다.
선생은 너무도 알려진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에스엔에스(SNS) 같은 것이 없었는데도 풍문처럼 선생의 소식을 들을 정도였다. <별들의 고향>, <고래 사냥>, <겨울 나그네>…….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은 작가는 넉넉하고 행복해 보였다. 물론 나는 치열하게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을 알고 있었다. 생활에 쪼들리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는 이들도 알고 있었다. 결코 비교하려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과거로 돌아가 그 갈림길에 선다면 선생이 어떤 결정을 할까, 그렇다면 독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소설을 읽고 있을까, 궁금했다.
후배를 불러 밥을 사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선배가 되고 알았다. 쉽지 않은 일을 선생은 즐겨 했다. 자리를 늘 유쾌하게 주도했지만 한참 아래의 후배들에게도 깍듯했다. 후배들을 아끼고 챙겼다.
선생의 작업실을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선생을 행운과 재능의 작가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엿본 선생의 작업실, 책상도 아니었다. 식탁 위엔 만년필과 잉크병, 그리고 원고지뿐이었다. 잉크를 닦아낸 휴지 뭉치가 널려 있었다. 작업 공간에는 놀랄 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놀랄 만큼 삭막했다. 그곳에서 선생은 자신이 정한 분량의 글을 꼬박꼬박 써나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선생의 고독을 보았다. 생래적인 작가의 고독, 유명세에 가려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못했을 고독, 선생 스스로 포기했다고 말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열망, 다시 돌아가려는 의지……. 물론 선생에게 직접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가족’ 마지막 연재에 선생은 이렇게 썼다. “참말로 다시 일어나 가고 싶다, 갈 수만 있다면 가난이 릴케의 시처럼 위대한 장미꽃이 되는 불쌍한 가난뱅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참말로 다시 일어나고 싶다.” 장미 가시에 찔리기라도 한 듯 나를 돌아보았다.
선생의 타계 소식에 불쑥 떠오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선생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던 불쌍한 가난뱅이의 젊은 시절이었다. 재기하려 했으나 병마에 꺾인 그 의지였다. 피우지 못한 붉은 장미꽃이었다. 행운에 가린 불운. 물론 선생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했다. 이젠 물어볼 수도 없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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